[박정훈 칼럼] 무너지는 ‘포퓰리즘 좌파 장기 집권론’

박정훈 논설실장 2021. 11. 2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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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퍼주기를 즐기는 듯하던 국민이 ‘No’라 하기 시작했다
유권자를 중독시켜 정권을 연장하려는 좌파의 집권 구상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 3일 민주당 중앙선대위 회의를 첫 주재한 이재명 후보. 그는 이 자리에서도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을 거듭 주장했지만 여론 반대가 많자 보름 뒤 전격 철회하고 말았다. /이덕훈 기자

10년 전 취재 간 그리스에서 한 나라를 파산으로 몰아간 정치 포퓰리즘의 말로를 생생히 목격했다. 그곳은 집단 광기가 휩쓰는 카오스(혼돈)의 나라였다. 국가 부도를 피하려 방만한 복지 지출을 줄이자 반발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아테네 한복판에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청소 노조 파업으로 거리마다 쓰레기 봉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경찰관들이 제복까지 입은 채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재판 중인 범죄자들이 판사 파업으로 거리를 활보할 지경이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복지의 파티’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만난 아테네 상공회의소 간부의 자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포퓰리즘을 ‘탱고 춤’에 비유했다. 처음 국민을 꼬드긴 것은 좌파 정치가였다. 하지만 이내 국민도 공범이 됐다. 탱고의 달콤함에 취한 그리스 국민은 선거 때마다 나랏돈 퍼주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그렇게 정치와 국민이 서로 부둥켜안고 망국(亡國)의 춤판을 벌였다. 그 간부는 “탱고는 혼자 출 수 없다”고 했다. 포퓰리즘의 악마성을 이처럼 정확히 짚은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포퓰리즘 정치는 마약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중독성이다. 선심성 복지로 국민을 유혹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단 중독만 시켜 놓으면 선거 승리는 식은 죽 먹기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경제가 침체될수록 선거 공학적 효과는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야 국민이 더 포퓰리즘에 안달하게 되니까.

‘남미의 역설’이라는 현상이 있다. 경제를 황폐화시키고 재정을 거덜 낸 포퓰리즘 정당이 선거만 하면 승리하는 기현상이다. 베네수엘라는 수많은 국민이 끼니조차 못 때우는 실패 국가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좌파 정권이 집권 중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복지 축소의 ‘금단 증세’를 못 참은 유권자들이 좌파 포퓰리스트에게 또 정권을 안겨 주었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상에게 매달리듯,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릴수록 자신을 그런 처지에 몰아넣은 포퓰리즘 정치에 손을 벌리고 있다.

한국의 운동권 좌파도 남미 모델을 벤치마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의 국정이 그랬다. 국민의 경제적 자립을 막으려 작정이라도 한 듯한 정책이 4년 내내 펼쳐졌다. 듣도 보도 못한 ‘소득 주도 성장’을 내세워 일자리를 줄이고 빈곤층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국민 살림살이를 곤궁하게 해놓고는 세금으로 일자리 만들고 지갑도 채워주겠다고 했다. 서민은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집값을 올려 놓고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임대주택에 들어와 살라고 했다. 어떤 정권 핵심은 ‘자기 집이 없어야 좌파에 투표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게 본심일 것이다.

여당 안에선 ‘20년 정권’이니 ‘장기 집권’이니 하는 얘기가 무성했다.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을 세금 퍼주기에 중독시키면 게임 끝이니까. 작년 총선은 정권 구상대로 굴러간 선거였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약속하고 지역마다 대규모 토건 사업을 공약했다. 선거 이틀 전엔 아동수당 1조원까지 뿌린 끝에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었다. 퍼주기 매표(買票)라는 불패 카드를 손에 쥔 듯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도 똑같은 전략을 들고나왔다. 이재명 후보는 월 수십만 원의 기본 소득이며 기본 주택, 기본 대출을 주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나라 곳간이 꽉꽉 채워지고 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들고나왔다. 음식점 총량제, 주 4일제, 가상 화폐 과세 연기처럼 대중 입맛에 맞는 공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국토보유세로 온 국민을 90 대 10으로 편 가르는 갈라치기 기술도 펼쳤다. 전형적 포퓰리스트 수법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퍼주기 선물을 마냥 즐기는 줄 알았던 국민이 놀랍게도 “노(No)”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봄 서울시장 선거에선 1인당 10만원씩 위로금을 주겠다는 여당 후보가 낙선했다. 부산에선 ‘가덕도 신공항’에 올인한 민주당 후보가 떨어졌다. 퍼주기 전략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여당이 ‘세금 납부 연기’라는 초유의 꼼수까지 쓰면서 밀어붙인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반대 여론이 60%를 넘어섰다. 급기야 이재명 후보도 전 국민 지원금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좌파의 필승 공식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드디어 국민이 정신 차리고 포퓰리즘에 퇴장 신호를 보낸 것일까.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 국민은 그리스·남미 국민보다 현명하다.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기본 소득’ 반대 의견이 65%에 달했고, 국토보유세에 대해선 55%가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67%가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고 답했다는 조사도 있었다. 국민이 ‘노’하는 순간 포퓰리즘 좌파의 장기 집권 구상은 뿌리부터 무너진다. 국민을 중독시켜 손쉽게 정권을 먹으려 하지 말고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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