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문학상 수상자 인터뷰.."분단역사 속 개인의 고통 녹여내", "문학은 국경 넘는 '통합'의 무기"
[경향신문]
5회 수상자 소설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
4회 수상자 소설 ‘작은 것들의 신’ 작가 아룬다티 로이
동독 출신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의 글은 친절하지 않다. 서사의 구조를 무질서하게 전개한다. 분절된 문장들 속에서 글을 읽어가는 작업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의 책 <모든 저녁이 저물 때>(한길사)도 마찬가지다. 에르펜베크는 이 소설에서 한 여인의 일생을 다섯 개의 막으로 나눈다. 소설 속 여인은 다섯 번에 걸쳐 죽음을 맞이한다. 작가는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여러 우연이 겹쳐 그가 그 시점에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를 이야기한다.
예니 에르펜베크(54)는 25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한국은 모두 분단을 겪었다. 사람은 나쁜 경험을 하고 나면 ‘나 자신은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된다”며 “역사적으로 모두가 함께 겪은 일들이 개인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일반화될 수 있는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에르펜베크는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방문했다. 이 상은 통일문학의 대표 문인인 고(故) 이호철 작가의 정신을 기려 2017년 서울 은평구가 제정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차별, 폭력, 전쟁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가들에게 수여한다.
김남일 선정위원장은 “20세기의 고단한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여성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관습과 율법, 폭력과 전쟁, 추방과 학살 등을 두루 견뎌낸 유럽 대륙의 생존자나 견뎌내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 작가가 보여준 진지한 관심과 애정이 이호철문학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에르펜베크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문학의 가능성과 저력을 입증한 작가로 주목받아왔다.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 모두를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판적 균형감각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유럽 난민들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에르펜베크는 “동독 출신 국민들은 통일 후 서독인이 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통일이 된 독일에서 동독 출신들은 외국인처럼 살았고, 여태껏 몰랐던 새로운 규율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배워가야 했다”면서 “우리가 난민은 아니었지만 통일된 독일에서 타인으로 취급받아왔다”고 말했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쓴 작품이다. 그는 “2008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다”면서 “‘만약 어머니가 다른 시점에 돌아가셨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 이 책을 쓸 수 있는 시작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난해 코로나19로 한국에 오지 못했던 제4회 수상자 아룬다티 로이(60)도 참석했다. 로이는 1997년 5월 발표한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문학동네)으로 단번에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이후 각종 논픽션 작품들을 선보여오다 꼭 20년 만인 2017년 두 번째 작품 <지복의 성자>(문학동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한꺼번에 갖고 태어난 주인공을 통해 소수자들의 사랑과 차별, 상처를 이야기한다.
로이는 기자회견에서 “문학은 통합의 무기이지, 분열의 무기가 아니다. 문학은 국경을 무너뜨리는 무기이지, 국경을 더 높이 세우는 무기가 아니다”라면서 “현재와 같은 디지털 시대에서도 그 어떤 것이든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문학은 사람의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국지적인 것이든, 세계적인 것이든, 그 스토리텔링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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