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위드 코로나, 민주주의를 위해

한겨레 2021. 11. 2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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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지난주 의료 기업 ‘카이저 퍼머넨테이’의 약사 노조가 파업을 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약병을 미리 채우라는 알림이다. 카이저 퍼머넨테이는 미국 서부에만 39개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민간 의료보험도 제공하는데 가입자가 1250만명이다.

며칠 뒤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 정문을 지나는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환호성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손팻말을 든 중년 남성들이 보였다. 네거리에는 휠체어에 앉아 손팻말을 들고 있는 초로의 남성도 있었다. 두달 전부터 파업을 하고 있는 카이저의 기술직 노동조합원들이다. 배관, 전기, 장비 등을 관리하는 노조원들이다. 파업의 쟁점은 ‘낮은 임금인상률 타개’와 코로나 시기에 등장한, ‘신입직원 임금삭감 저지’이다. 기존 직원의 임금을 줄이기는 어렵기에 사쪽은 손쉬운 인건비 절감책을 선택했다. 카이저 노조원들은 미래의 조합원들에게 닥칠지 모를 노동 조건의 후퇴를 막기 위해 파업으로 뭉친 것이다. 그리고 약사 노조는 파업 전야에 뜻을 관철시켰다.

사흘 전, 또 다른 이메일이 왔다. 카이저 간호사 노조와 정신과 의료진 노조가 기술직 노조와 연대해 동조 파업을 한다는 고지였다. 8만명에 이르는 카이저 간호사 노조의 힘은 막강하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캘리포니아주에 ‘간호사 1인이 담당하는 중환자실 환자 수를 2명으로 제한하는 법’이 생겼다는 말까지 돌 정도다. 카이저 간호사 노조는 사쪽과 맺은 기존 협약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새 협상안을 낸다고 한다. 파업을 전제한 협상안이다. 특히 코로나19 비상 운영 체제 속에서 1.5배 많은 환자를 담당하는 과부하와 병실 환자 수 증가로 인한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를 정상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는 포스트 코로나로 연착륙하고 있다. 레스토랑은 북적이며, 핼러윈 때 귀신의 집이 붐볐던 것처럼, 이제 추수감사절 방학을 맞아 스케이트장으로 아이들이 몰린다. 의료 기업 노조의 파업도 일상을 회복하려는 캘리포니아인들의 노력이다. 캘리포니아 23개 도시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 강사진 노조(조합원 2만9천명)도 임금 협상에 앞서 파업을 논의하고 있다. 모두 코로나로 무너진 일상을 복구하는 과정이자, 코로나 이후 찾아온 급격한 변화를사람들의 삶에 맞게 순응시키려는 도전이다. 위드 코로나!

지난 13일, 서울 흥인지문 네거리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는 사전에 이미 불법집회로 규정됐고, 집회가 강행되자 경찰은 전방위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벌써 20명을 입건했다. 정부는 ‘방역 우선’ 방침을 내세우며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 아니라 감염병 위반 혐의를 수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진실은 ‘방역을 이유로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방역을 앞세웠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위드 코로나이기에. 코로나19 이후 광장은 닫혔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는 모두의 안전을 위해 자발적 혹은 반강제적 휴지기를 맞았다. 오늘, 위드 코로나는 경제를 위해 더욱 힘차게 펄떡인다. 일하는 사람들, 방역으로 인한 손실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직도 거리두기 4단계 속에 있다. 코로나19 위기는 돈의 흐름을 갈라놓았다. 플랫폼 노동의 확산 등 디지털 자본주의로 급발진하면서 자본시장뿐 아니라 노동시장도 요동친다.

디지털 자본주의, 과연 세상에 없던 혁신일까? 단어가 일으키는 착시 현상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지금은 이 시간을 다스릴 새로운 사회규범을 기다릴 때가 아니라 지난 100년 동안 세워온 사회규범을 현상의 본질을 꿰뚫으며 적용할 때다. 오늘의 일상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하는 인간은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다. 일하는 자를 위한 안전망만이 허물어지고 있을 뿐.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회에서 5인 미만 사업장 및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놓인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로 인정받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요구했다. 진정한 위드 코로나라면 코로나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커져가는 사회안전망의 구멍을 메우는 것 또한 포함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위드 코로나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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