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40년차 국제대회 첫 1위 "인생 속도 조금 느릴뿐"

이영빈 기자 2021. 11. 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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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온스 PBA 챔피언십서 우승한 '벨기에 백전노장' 52세 레펜스
"똑같이 굴러가는 공은 없습니다, 힘든 순간 많았지만 포기 안했죠"

“인생의 속도는 전부 다른 법이에요. 누군가는 조금 빠르고, 저는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뿐입니다.”

만 12세에 당구 큐(당구봉)를 잡아 40년 동안 당구대 앞에 서 온 ‘벨기에의 백전노장’ 에디 레펜스(52·SK렌터카)가 생애 처음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23일 밤 경기도 고양시 소노캄고양에서 열린 PBA(프로당구협회) 2021~2022 시즌 세 번째 대회인 ‘휴온스 PBA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레펜스는 조재호(41·NH농협카드)를 세트스코어 4대1로 꺾으며 정상에 올라 질긴 한을 풀었다.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하고 있는 에디 레펜스. 당구 인생 40년 만에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아쉬웠던 과거가 촘촘히 쌓여 오늘의 우승을 일궈냈다”고 했다. /PBA

당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40년 당구 인생’을 산 레펜스는 프레드릭 쿠드롱(SK렌터카)과 함께 벨기에를 대표하는 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이상할 정도로 국제대회 우승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벨기에 국내 대회에서만 15차례 정상에 올랐을 뿐, 세계선수권대회나 월드컵 등 세계 무대에서는 뛰어난 실력에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2019년 PBA가 출범한 이래 참가한 16개 대회에서도 2019년 말 SK렌터카 챔피언십 4강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래서 따라다닌 꼬리표가 ‘무관의 제왕’이었는데, 드디어 없앴다. 우승 상금 1억원도 손에 넣었다. 이날 경기를 마친 뒤 레펜스는 “지금 이 순간이 내 베스트 모멘트(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라며 감격했다. “오랫동안 경쟁해왔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기까진 올라오지 못했다”며 “이번 우승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덕”이라고 했다. 쿠드롱도 경기장으로 직접 와서 그를 안아주며 기쁨을 나눴다.

레펜스의 좌우명은 ‘긍정적인 마음(positive mind)’이다. “큰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지금껏 그만둘까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힘든 순간은 있었죠. 기회가 있었는데 잡지 못한 적도 있고요. 그래도 절대 도망가지 않았어요. 해결 방법을 찾으려 더 골몰했죠. 따로 둔 ‘멘털 코치’와 늘 이야기하며 매사를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결국엔 해결되더라고요.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적 없었다는 단점도 결국엔 해결했잖아요?”

이장희 SK렌터카 감독에게 레펜스는 ‘거북이 같은 친구’다. 앞으로 천천히 나아갈지언정 뒷걸음질은 치지 않는다는 애정 어린 별명이다. 레펜스는 한국에 온 첫날부터 팀원들과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렸다. 지금은 김치찌개, 추어탕 같은 매운 음식도 곧잘 먹는다. 이 감독은 “그래서 우리 사이에서 별명은 ‘하프 코리안(half korean)’”이라며 “너그러운 성격 덕에 우리나라에 잘 적응해서 감독 입장에선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52세 나이에도 프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아내 안드레아에게서 받는다. 아내는 그가 나서는 모든 경기를 찾아가 응원한다. 이번에도 우승을 확정하자마자 관중석에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남편을 껴안았다. 둘은 시즌 동안엔 전세로 구한 경기도 분당의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지낸다. 비시즌 때는 벨기에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는 세 딸과 서로 그리움을 채우고 다시 한국으로 온다. 매일 5~10㎞씩 뛰는 달리기도 오랜 선수 생활의 원동력이다. 당구에 필요한 고도의 집중력은 전부 체력에서 나온다고 레펜스는 믿는다.

당구는 늘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레펜스가 40년 동안 당구를 즐긴 이유다. “40년 동안 똑같이 굴러간 공이 한번도 없었어요. 전부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매일매일 새로운 걸 배운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이것이 제가 당구를 정말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레펜스는 24일 단 하루만 우승의 기쁨을 누린 뒤 25일부터 다시 연습에 나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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