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그럼 한번 해봐요!

박돈규 기자 2021. 11.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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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정동환은 늙어도
정신적으로 더 짱짱하다
비관과 하향평준화가 病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
공연 ‘난타’의 제작자이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으로 활약한 배우 송승환.

배우 송승환(64)은 2018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빠르게 시력을 잃었다.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6개월 후 실명’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눈은 더 나빠지지 않았지만 30cm 앞에 있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 시각장애 4급. 뿌연 안개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 이 상투적인 문장이 송승환에게는 비유가 아니라 실존에 가깝다. 시력을 잃은 직후 실망했고 겁도 났다고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싶을 때 그를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일이었다. 2019년 한 PD가 그에게 드라마 출연을 제안했다.

“내가 사실 잘 안 보여.” “아니 그래도 대충은 보이잖아요.” “형체는 보이지.” “그럼 한번 해봐요!”

송승환은 용기를 냈다.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 운전면허를 반납했고 움직일 때마다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았다. “눈이 안 보여도 일을 계속할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는 순간부터 의욕이 생겼고 길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했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은 연극 ‘더 드레서’를 공연 중이다.

배우 정동환(72)은 6시간짜리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무대에 섰다. 그는 1인 5역으로 종횡무진하며 20분이 넘는 독백을 두 번 던졌고 진흙과 색소, 밀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예술 작품을 만날 때 내가 그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를 들여다보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이 연극이 그랬다. 선과 악, 위선과 위악, 천사와 악마 같은 인간의 심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1인 5역을 능란하게 연기하는 배우 정동환. /극단 피악

정동환에게 ‘이제 좀 편안한 연극을 해도 되지 않냐’고 물었다. 대답은 후려치는 죽비 같았다. “썩어빠진 생각이다. 해낼 수 있는데 피하면 배우는 위축된다. 그게 반복되면 무너진다. 아주 어려운 배역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다. 이렇게 위기를 자초하는 이유는 계속 도전하는 배우도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송승환은 대본을 들으며 외운다. 어떻게 반응하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연습 기간에 몸으로 익힌다. 아역 배우로 출발해 ‘젊음의 행진’ MC를 맡았고 ‘난타’도 제작한 그에게 세상은 한때 만만해 보였다. 이젠 흐리고 멀고 아득할 것이다. 그런데 송승환은 “이만큼이나 보이는 게 고맙다. 다음 연극 스케줄도 잡아 놓았다”며 명랑하게 웃었다.

좋은 연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성찰하게 한다. 좋은 배우도 매한가지다. 정동환은 ‘월차든 휴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싶을 만한 연극을 만들지 않는다면 연극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통스러운데 행복하다. 세상이 하향 평준화를 시켜서 그렇지, 우리는 다 귀한 사람들이다. 극장은 그 가치를 확인하는 곳이어야 한다.”

배우는 자기 몸에서 빠져나와 타인을 연기하는 게 생업이다. 송승환과 정동환은 밥벌이보다 더 큰 이유로 연극을 한다. 송승환에게 무대는 ‘시각장애 4급의 무력한 노인’을 벗어나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주는 장소다. 정동환은 무슨 일을 하기에 어울리는 나이가 있다는 편견을 깨려고 무대에 오른다. 두 배우는 캐릭터를 탐욕스러울 만큼 연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연기한다.

비관과 게으름, 하향 평준화가 만연하다. 그것이야말로 병(病)이다. 할 수 있는데 왜 피하나. 송승환은 ‘안 보여도 한번 해보자’며 부딪쳤고 배우로 돌아왔다. 연극에 에베레스트가 있다면 정동환은 어렵고 위험한 루트를 고르는 등반가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늙어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짱짱하다. 두 배우는 말한다. 우리는 다 귀한 사람들이라고. 그럼 한번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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