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 명란→대장간, 신념을 이어가는 상속자들 [종합]

김한나 온라인기자 2021. 11. 2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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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tvN 방송 캡처


‘유 퀴즈 온 더 블럭’ 사명을 이어받은 상속자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24일 오후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상속자들’ 특집이 전파를 탔다.

이날 증조할머니 레시피로 16년째 여의도에서 벨기에 전통 와플을 굽는 패트릭 자기님이 등장했다. 그는 “코로나 19전에는 하루에 1,000~1,500개 정도 판매했다”라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혼자 만드냐는 질문에 패트릭은 “매장이 하나 있던 시절에는 손으로 반죽 하나씩 다 했다. 지금은 매장이 조금 많이 생겨서 다 기계로 하고 있다. 지금 매장은 총 10개 있다”라고 말했고 조세호는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아 웃음을 자아냈다.

패트릭은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냐는 물음에 “2002년 어머니가 순복음교회를 관광하고 싶어 했다. 2주 정도 관광하고 벨기에로 돌아갔다. 한국에 있을 때 너무 좋아서 다시 가고 싶었다. 2년 뒤 한국 신학교에 진학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 마음이 다 따뜻했다. 한국 인터넷이 너무 빨랐다. 한국은 다 빠르다. 택배도 주문하면 바로 나온다”라고 한국에 와서 놀랐던 점을 말했다. 당시 한국에 리에주 와플이 없어 장사를 시작했다고 밝힌 패트릭은 “다른 와플과 약간 다르다. 원래는 사람들이 브뤼셀, 미국 와플만 알고 있었다. 리에주 와플은 펄 슈가를 이용한다. 일반 와플을 먹으면 맛있다. 브뤼셀, 미국 와플은 토핑이 필수다”라고 소개했다.

증조할머니로부터 4대째 전수된 아플 레시피로 패트릭은 “20년 전, 부모님이 이사해서 잊어버려서 속상하다. 그래도 레시피는 다 기억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에서 와플 만들면 많이 먹었다. 행복했다. 계속 연습해서 100%로 만들고 있다”라고 미소지었다.

레시피를 알려주겠다는 패트릭은 “밀가루, 이스트, 벨기에 설탕 펄 슈거, 달걀, 우유가 있다. 그다음은 비밀이다”라고 말해 반전을 자아냈다. 와플 장사를 하며 어머니와 다섯째 남동생과 장사를 시작했다. 이어 2013년 넷째 동생과 여섯째 동생도 합류했다.

현재는 모두가 벨기에로 돌아갔다고 말한 패트릭은 “처음에 한국 왔을 때 벨기에 가고 싶었다. 말도 못 하고 손님들이 들어오면 보디 랭귀지를 했다. 여기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아내와 아이들도 여기 있으니 벨기에에 가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손님이 와플을 사면 와플 안에 축복을 보낸다. 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고 믿는다. 당신이 누구든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게 와플에 축복을 담는 이유다”라고 전했다.

tvN 방송 캡처


일본 명란 시장을 휩쓸며 연 200억 매출을 기록, 2대째 한국 전통 명란을 지키는 장종수 대표가 출연했다. 명란만 40년을 연구했다는 그는 “아버님이 우리나라 수산제조 부문의 대한민국 명장이시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명장이다. 아버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대한민국 명장은 없다”라고 밝혔다.

2006년 명란 사업을 이어받게 된 계기로 장종수 자기님은 “원래 서울 환경부 산하의 한 공기업에 다녔다. 환경 관련된 정책자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아버지께서 2006년 자사 공장을 만들고 확장을 하셨다. 내려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심상치 않구나’ 생각하고 내려오게 됐다. 그리고 제가 장남이라 아버님의 전폭적인 기대 속에서 자라왔다. 당시 대학 분위기가 학생운동, 마지막 세대였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으로 졸업을 못 하고 유학을 가서 호주에서 졸업했다. 아버님 속을 많이 썩여드렸고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내려왔다”라고 전했다.

일본 최대 규모 유통업체에 명란을 납품했다는 장종수 대표는 “일본의 그 그룹은 자존심이 있었다. 국산을 가능하면 쓰려고 하는 그룹인데 2009년부터 7년간 일본 그룹에 납품했다. 마크를 달고 나간 제품이었다. 그쪽에 명란은 처음으로 수출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당시 매출이 200억 정도에 생산 80~90% 정도를 일본에 수출했다는 그는 “당시에는 우리나라 시장이 없고 일본 시장이 정말 컸기 때문에 일본 시장을 중심으로 했다. 지금은 일본 시장 없이 100% 국내로 하고 있다. 아베노믹스 때문에 1,500원까지 갔던 환율이 890원 정도까지 떨어졌다. 수출 대금을 엔화로 받으니 의미가 없어졌다”라고 밝혔다.

수출 직격탄을 맞았던 시기에 국내시장이 열리지 않았던 때라 2016년 자사 공장을 매각하고 임대 공장으로 이전하게 됐다. 그는 “저도 마음이 아팠는데 아버님께서 훨씬 충격 많이 받으셨다. 임대로 들어갔는데 단지 내에 구내식당이 큰 게 있는데 아버님께서 점심때 식사를 안 하려고 하시더라. 워낙 수산업계 원로시니까 가면 후배들도 만나니 자존심이 상하니까 컵라면, 삼각김밥을 사주면 먹겠다고 하셨다. 그 해에 아버님이 간암 말기로 판명이 나셔서 이듬해 돌아가셨다”라고 말했다.

TV 방송 때문에 내수 시장 길이 더 열렸다는 장종수 대표는 “2017년 초 김사랑 씨가 명란 아보카도를 만들었다. 그 방송 이후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라고 전했고 유재석은 “2017년 매출을 110억 원으로 끌어올렸다. 김사랑 씨가 우리나라 명란 시장을!”이라고 미소 지었다.

2017년 내수 시장만으로 흑자 전환을 하게 된 장종수 대표는 “잘 모르시겠지만 명란 산업에 큰 공헌과 기여를 해주신 부분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며 김사랑에게 영상 편지를 전했다.

명란이 어디서 시작하게 된 음식이냐는 물음에 장종수 대표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10배 시장이 크다고 한다. 전 세계 시장의 80~90%를 차지하니 ‘일본이 원조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나라가 원조다. 단순히 원조가 아니라 명태라는 물고기에서 나오는 게 명란이다. 농업 부문에서 쌀과 김치를 이야기할 때 수산 부문에서 명태를 빼놓을 수 없다. 명태는 다른 나라에서 먹지 않는데 우리나라가 그걸 개발해서 먹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반도 수산 쪽에서 제일 많이 유통됐던 국민 생선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일제강점기 때 만나게 되면서 명태라는 물고기에 주목했는데 명란을 더 좋아했다”라며 “일본 사람들은 명란을 가져가고 자기들은 명태를 잡아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교류가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이 있냐는 말에 장종수 대표는 “질문과 과제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이 황무지와 폐허 같은 시장에서 명란을 가지고 자기가 바라는 명란을 만들기 위해 싸워왔다고 생각한다. 그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과정, 자신만의 과제를 푸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어받아 저만의 색깔로 응답해야 하는 환경에 있지 않나 싶다. 이 과정을 통해 명란의 세계가 더 발전하고 진전되리라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tvN 방송 캡처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을 전수받아 3대째 떡볶이 맛을 지키는 김선자, 박은순 모녀가 등장했다. 1953년에 시작한 떡볶이 집은 2, 3대가 이어받아 68년 전통을 자랑한다.

다섯 가족이 전부 떡볶이 집을 하냐는 물음에 김선자는 “형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쉬시고 둘째, 셋째 며느리가 함께 가게를 운영한다. 막내아들은 따로 가게를 운영한다”라고 밝혔다.

김선자 자기님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앞치마 두르고 일을 했다. 하루도 안 쉬었다. 1976년에 결혼하고 지금까지 해왔으니 46년 정도 됐다”라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현재 비법소스를 세 명의 며느리만이 안다는 말에 조세호는 “인터넷에 비법 소스가 떴다. 고추장 15 : 춘장 1이다”라고 밝혔다.

그 말에 김선자와 박은순 모녀는 웃음만 흘려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었다. 비법 소스를 늦게 알려준 이유로 박은순 자기님은 “할머니 중심으로 똘똘 뭉쳐 사는 것을 하늘나라 가서도 이렇게 살아라는 마음으로 늦게 알려주신 것 같다”라고 전했다.

형제들끼리 다투는 경우를 묻자 김선자 자기님은 “남남이 모여있는데 45년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라며 떡볶이 가문의 유지 비결을 알렸다. 광고 이후 떡볶이 가게가 더욱 성업한 것에 박은순은 “몇 미터씩 줄을 섰다”라고 말했다. 당시 가게 매출을 묻자 김선자 자기님은 “그건 내 담당이 아니었다. 어머니 혼자 관리했다”라고 말했고 박은순 자기님은 “그건 며느리도 모른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마복림 할머니가 떡볶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로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남편과 미군 물품을 팔았다고 밝힌 박은순 자기님은 “아들이 다섯을 홀로 키우니 너무 벅차던 때에 시댁 어른이 오셔서 신장개업한 중식당으로 가게 됐다. 개업한 집이니 가래떡을 받아 드시고 있는데 짜장면에 떨어져 먹는데 괜찮았던 거다. 자꾸 먹다 보니 느끼해서 고추장을 섞어서 지금 할머니의 떡볶이가 나왔다”라고 밝혔다.

학생들 때문에 사리 문화가 생겼다는 질문에 박은순 자기님은 “당시는 배고픈 시절이니 라면을 가져오신다. 거기다 끓여먹으면 양도 많아지니 그걸 할머니께서 보시고 이것저것 넣다 보니 지금의 세트가 나왔다”라고 전했다.

시간이 흘러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다는 말에 박은순 자기님은 “저도 시켜먹는다”라고 말했고 김선자 자기님은 “딸이 아래층에 산다. 가보면 손녀들이 떡볶이를 사다 먹는다. ‘쟤들은 떡볶이가 널렸는데. 저걸 딴 데서 먹고 있으니’”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박은순 자기님은 맛 유지가 쉽지가 않다고 말했고 김선자 자기님은 철저하게 이야기를 숨겨 폭소케 했다. 언제까지 하고 싶냐는 물음에 김선자 자기님은 “더 해야 한다. 딸이 처음 가게에 들어온다 했을 때 걱정을 많이 했다. 들어오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이제 마음을 놓았다. 비법을 알려주기엔 이르다”라고 비밀을 지켰다.

故 앙드레김이 단골이었다는 박은순 자기님은 “옆 테이블에 학생들이 먹고 있으면 그 집 것까지 다 내준다. 다 계산하고 남는 것은 팁으로 주신다”라고 전했다. 또한 신당동을 다시 살아나게 해 줬던 경수진이 기억난다는 박은순 자기님은 “그날 신당동이 일대가 마비가 됐다. 경수진 님 다시 오시면 사리 서비스드릴게요”라며 미소 지었다.

tvN 방송 캡처


4대째 105년 대장간의 불씨를 잇는 전만배, 전종렬 부자가 등장했다. 전만배 자기님은 “3년 전에 서울 사업장을 아들에게 넘긴 후 저는 대전에서 서울과 같은 서비스를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부여 쪽에서 대장간이 시작됐으나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할아버지의 부여 대장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말에 전만배 자기님은 “아버지도 187cm에 통뼈였다. 육군 씨름왕에 기갑 부대 전차단 1기생에 참전 용사였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사 전우치가 직계 조상이다”라고 화려한 스펙을 자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놀러 나간다고 하더니 이틀 만에 들어오셨는데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전답까지 다 넘기며 각지로 돌아다녔다”라고 덧붙였다. 14세가 되던 해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는 전만배 자기님은 “당시 서울 칼 공장만 47군데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칼 좀 갈아보라고 했다. 1원에 풀빵이 12개이던 시절이었는데 혹시 2, 3원이라도 용돈 탈까 싶어 최선을 다 했다. 그때 못했어야 했는데 너무 잘해서 줄줄이 엮여버린 거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 말에 아들 전종렬 자기님은 “안타깝다. 저는 대학까지 나왔는데 아버지는 일하시느라 졸업을 못 하신 게 좀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칼 제작 전문 대장간을 차렸다는 전만배 자기님은 “중국 국경이 개방되면서 농기구가 쏟아져 들어왔다. 1/20, 1/30 가격으로 들어왔다.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하다 96년부터 5년간 전국 일주를 했다. 칼을 만들어 차에 5천 자루를 싣고 사용자들을 만났다. 5년 동안 하나보니 집마다 칼 몇 자루 없는 집이 없다. 조금만 더 쓰기 편하고 잘 들면 돈에 구애를 받지 않더라. 그때 ‘대기업 흉내를 내보자’ 싶어 생산, 판매, 서비스를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칼에 대한 안정적인 수요가 있는 노량진에서 자리를 잡은 전만배 자기님은 자리 잡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별별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한다. 나한테 칼을 사거나 갈면 돈을 주는데 자기가 갑이다 이거다. 그러면 오지 말라고 했다. 거칠어도 상상을 뛰어넘더라”라며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켜 폭소케 했다.

국내 참치 명인 1호 양승호 조리장은 “한 번 잡아놓으면 석 달 칼을 갈지 않아도 된다. 날이 항상 서있다. 쫙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칼에 혼을 담았나?’라는 생각도 든다.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다”라며 전만배 자기님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양승호 조리장뿐만 아니라 이연복 셰프 등의 단골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러브콜도 받는다는 전만배 자기님은 “직접 스카우트 제의까지 왔다. 세계 요리 감정평가사 3인 중 한 명이라고 하더라. 연봉 18억을 줄 테니 독일로 가자고 하더라. 내가 갖고 있는 걸 18억에 팔긴 싫었다. 계약금 18억, 내가 살 집, 차량 제공하라 했더니 포기하더라. 독일을 기점으로 체인 사업하려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맞다고 해서 18억으로 못하겠다고 했다”라며 가문의 소중한 기술에 신념을 보였다.

장래에 고민을 하던 아들 전종렬 자기님은 “후계자라는 자리가 아들밖에 없을 것 같더라. 맨날 아버지랑 일 하던 사람이 기술 키워놓으면 안 하겠다고 나가서 사라지고 했다. 이걸 보면서 가업이라는 게 타인한테 들어가기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라고 전했다. 전만배 자기님은 “아들이 안 했으면 했다. 내 고생은 내 선에서 끝나길 바랐다. 좀 더 편하고 깨끗한 직업. 하루 16, 17시간 일하지 않았으면 했다”라고 안타까움을 밝혔다.

아들은 가업을 잇기 위해 매주 자신을 단련했다. 전종렬 자기님은 “항상 내가 아빠보다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다. 항상 칼을 갈 때 그 생각을 하면서 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하실 때만큼은 엄격할 수밖에 없는 게 대장간 일이 보호장구가 없다.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걸 욕심내서 하다가 손가락 인대가 한 번 잘렸다”라고 설명했다.

그 말에 전만배 자기님은 “칼 갖고 다칠 때는 최소한 잘리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작업할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나에게 칼이란?이라고 묻는 말에 전만배 자기님은 “삶이고 인생이다”라고 말했고 전종렬 자기님은 “제 인생에 스며들어서 운명처럼 들어왔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한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40분에 방송된다.

김한나 온라인기자 klavie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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