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만 하셨는데"..5·18 유공자 고 이광영씨 빈소엔 '탄식'만

김동수 기자 2021. 11. 2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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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이광성씨 "힘없고 어려운 분 돕고 보듬어..민주주의에 앞장서"
24일 광주 북구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5·18 유공자 고 이광영씨의 빈소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2021.11.24/뉴스1 © News1 김동수 기자

(광주=뉴스1) 김동수 기자 = "살아 생전에 고생만 하셨는데…."

80년 5월 광주 학살의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이 숨지던 날, 40년이 넘도록 5·18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광영씨의 빈소에는 깊은 탄식이 가득했다.

24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장례식장. 5·18 유공자 고 이광영씨 빈소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 입구에는 5월 단체 등 이름이 적힌 근조화환이 들어찼고 빈소 안에는 조문객들이 고개를 떨구고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유족들의 표정에도 슬픔과 비통함이 가득했다. 조문객들은 유족에게 "훌륭한 분이 가신 거다", "대단한 분이니 어디서든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분"이라며 위로했다.

고인과 40년지기 친구인 조봉훈씨(69)는 "고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아프다. 40년간 모르핀(아편의 주성분인 알칼로이드)을 처방 받으면서 버텨왔는데 통증이 갈수록 심각해졌다"며 "살이 쭉 빠지고 너무 괴롭다 보니 결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애통해했다.

그러면서 "통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니면 친구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지 일주일 전 쯤에 전화가 왔다"며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황망했다. 마지막 가는 친구 곁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24일 광주 북구 한 장례식장에서 5·18 유공자 고 이광영씨의 동생 이광성씨가 고인을 회상하고 있다.2021.11.24/뉴스1 © News1 김동수 기자

고인의 친동생 이광성씨(61)는 <뉴스1>과 인터뷰에서 "형님은 한마디로 의로운 분이셨다"며 "삶의 지향이 힘없고 약한 자들을 돕고 보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랜 시간 형님을 지켜봤는데 고통과 통증이 이루 말할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며 "옆에서 지켜만 보고 함께 아파하지 못해서 자괴감이 든다"고 울먹였다.

이씨는 "형님은 나이가 들면서 사회활동을 줄이고 조용히 살고 싶어했다. 10년 전부터 강원도 태백 일원에 계시면서 몸도 추스리고 건강관리를 했다"며 "형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처방받기 위해 광주에 내려와야 했다. 그때마다 '형님 강원도에 계시지말고 광주로 오시든지, 가까운데서 같이 지내자'고 여러 번 말했다"고 설명했다.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고인은 지난해 가을 무렵, 전북 익산으로 요양지를 옮겼다. 가까운 곳으로 오긴 왔지만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져 쓰러지기도 했다.

이씨는 "약을 많이 섭취해 위가 안 좋아졌다"며 "치료하고 퇴원했다가 또 입원하는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약해지셨다"고 말했다.

또 "형님이 최근에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서 오히려 형님에게 '광주에서 같이 살자'고 했고 형님 역시 '알겠다'고 답했다"며 "그런데 며칠 전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갔는데 형님이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씨는 지난 22일 전북 익산에 있는 고인의 요양지를 직접 찾았다가 고인의 방 침실 베개 머리맡에서 담긴 봉투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라는 글씨가 봉투에 적혔고, 안에는 A4용지 한 장짜리 유서가 있었다.

'나의 가족에게. 어머니께 죄송하고 가족에게 미안하고 친구와 사회에 미안하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나의 이 각오는 오래 전부터 행각해 온 바,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 아버지께 가고 싶다. 2021.11.22. 16시 이광영 졸필'

당시 유서를 접한 이씨는 "'인생 막바지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형님은 5월 유공자라는 것에 대단한 자긍심을 느끼고 사셨다"며 "5월 당시 최루탄이 날아들고 주변에 피를 흘리는 시민들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시 5월의 폭도로 몰리자 생전에 형은 '내가 왜 폭도냐'며 굉장히 억울해했다"고 전했다.

또 "형님 같은 분이 있어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라며 "아직까지도 유공자 보상과 5월 광주의 진실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80년 5월 당시 군복무를 마치고 조계종 한 사찰의 승려로 생활했다. 그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앞두고 광주를 방문했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해 시위와 환자 이송에 동참했다.

고인은 광주 구시청 사거리에서 백운동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계엄군이 쏜 총에 척추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는 1988년 국회 광주 특위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19년 5월13일전두환 사자명예훼손 혐의 1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했다.

재판에서 헬기 사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여학생을 구조해 적십자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증언했다.

kd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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