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 없다" 유서..전두환 숨진 날 극단선택한 5·18 부상자

강현석 기자 2021. 11. 2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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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휠체어 타고 통증 앓은 60대
88년 청문회 ‘만행’ 증언도…“80년 이후 46명 목숨 끊어”

빈소 지키는 차남 전재용 전두환씨 차남 재용씨가 24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씨 빈소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18민주화운동 학살의 최고 책임자로 꼽힌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한 날 5·18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평생을 고통받았던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1980년 5·18 이후 뒤틀린 삶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는 최소 46명에 이른다.

2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3일 오후 4시쯤 전남 강진군의 한 저수지에서 5·18 부상자인 이광영씨(68)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씨가 발견된 곳은 그의 고향 마을이었다. 경찰은 지난 22일 “전북 익산에서 홀로 요양하고 있던 이씨가 유서를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는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고향 마을을 수색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22일 오후 11시30분쯤 혼자 차량을 운전해 고향에 도착했다.

이씨가 숨진 곳 인근에는 그가 태어난 집과 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경찰은 그가 이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A4용지에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겼다”고 말했다. 유서에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말과 함께 “5·18에 원한도 없고 작은 서운한 것들은 다 묻고 간다”고 적혀 있었다.

이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쏜 총탄이 척추를 관통해 평생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 왔다. 최근 통증이 심해진 그는 25일 광주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로 예약한 상태였다.

1980년 당시 승려였던 이씨는 ‘부처님오신날(5월21일)’ 행사를 돕기 위해 광주의 한 사찰을 찾았다가 5·18과 맞닥뜨렸다. 행사 준비를 위해 광주 도심 시장을 찾았던 이씨는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만행을 목격했다. 이씨는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숨지거나 다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활동을 했다. 금남로 인근에서 부상당한 채 쓰러진 시민 5∼6명을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던 이씨는 자신도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았다. 총탄은 이씨의 척추를 관통했고 그는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이씨는 1982년 5·18 당시 부상자 18명과 함께 ‘부상자회’를 만들었고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계엄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이씨는 2019년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씨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 자신이 목격한 헬기사격을 증언했다.

이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5·18 피해자들은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5·18 부상자인 강상원씨는 “이씨가 최근 통증이 갈수록 심해져 힘들어 했다”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다”고 전했다. 박갑술 5·18부상자회 회장은 “이씨가 얼마 전까지도 사무실을 찾아와 5·18 손해배상 문제를 논의했는데 참담하다”면서 “많은 5·18 피해자들은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명희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5·18 자살의 계보학: 치유되지 않은 5·18’에서 “2019년 11월까지 알려진 자살 피해자가 46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5·18 생존자들의 자살 피해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자살”이라면서 “더욱 심각한 것은 5·18 자살자들이 겪었던 고통이 2세대와 유가족 피해로까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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