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교류 역사를 찾아..문화재학계에 북방 바람

노형석 2021. 11. 2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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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특별전' 삼국 교류 조명
국립부여박물관서 28일까지

고고학계 실크로드 학술대회
미술사학계 이민족 왕조 연구도
5세기 중국 북위시대 귀족의 행차 모습을 보여주는 당대 도용(흙인형)들의 행렬. 2013년 북위의 옛 도읍 평성이 있던 다퉁시의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국립부여박물관의 특별전 ‘북위-선비 탁발부의 발자취’(28일까지)에 나온 핵심 유물로 다퉁시박물관 소장품이다.

‘어휴! 너무 무거워….’

퉁퉁한 주인을 태운 말이 1600년 넘도록 헉헉거리며 서 있다. 말 주인은 말등 위에서 육중한 몸을 곧추세우며 한껏 위엄을 부린다. 뒤따르는 귀족 어르신 행렬을 이끄는 길라잡이다. 말은 그의 덩치에 짓눌려 괴로운 기색이다. 뒤이어 소가 끄는 귀족들의 전용 수레들이 옆에서 호위하는 남녀 시종들 대열과 함께 줄줄이 등장하는 장관이 대형 진열장 속에서 펼쳐진다.

이런 귀족들 행렬 모습은 지금 충남 국립부여박물관에 차려진 특별전 ‘북위-선비 탁발부의 발자취’(28일까지)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4~5세기 중국 대륙의 북쪽을 지배하며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와 밀접하게 문화예술을 나누었던 선비족 나라 북위의 출토 유물들을 사상 처음 중국 밖으로 가져와 선보인 자리다. 북위시대 만든 흙인형 도용들의 행렬로 생생하게 재현된 당대 귀족의 행차 현장 모습이 압권이다.

북위 특별전은 요즘 국내 문화재학계에 불고 있는 북방 바람, 남방 바람, 서방 바람을 단적으로 표상한다. 중국 둔황(돈황) 유적 답사로 요약되는 실크로드 열풍은 20여년 전 이미 불었지만, 최근엔 삼국과 교류한 4~6세기 북위, 고려 왕조와 대립과 화친을 거듭하며 문화 교류를 했던 거란·여진의 요·금, 몽골의 원제국 등 북방 유목민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뜨거운 관심 속에 활성화되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의 특별전에 나온 6세기 북위시대의 불상(중국 뤄양박물관 소장). 두 손을 마주잡고 대좌에 앉은 부처상 뒤로 세 분의 작은 부처상이 새겨진 광배를 붙였다. 사각 받침대에 효명제 재위기인 정광 5년(524년)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런 양상은 지난 5~6일 한국고고학회(회장 김길식)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북 경주에서 공동주최한 45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도드라졌다. 이번 대회에서는 ‘한반도를 넘어서’란 전체 주제 아래 실크로드 고고학과 북방 초원을 통한 동아시아 교류사 등이 핵심 소주제로 부각됐다. 실크로드사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역사학계에서 큰 화두였지만, 고고학계 쪽에서는 2010년대 이후로 문헌자료 연구를 넘어선 구체적인 현장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쌓인 중앙아시아·동남아 발굴 답사 경험과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로만글라스 연구, 동남아 해상 실크로드 연구 등 구체적인 경로 탐색과 현지 유물 비교 연구 등이 활성화됐고, 이런 흐름이 고고학대회에 반영돼 집중적인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로만글라스’로 불리는 고대 유리유물 연구에 주력해온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유리기로 본 유라시아 실크로드’란 발표문을 통해 1973년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기들을 분석하면서 지중해 원산지에 중앙아시아, 인도양~동남아로 이어진 전래 경로를 추정하는 설을 내놓았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도 중앙아시아와 북방 초원로를 통해 이뤄진 청동기·철기 문화 등의 교류사를 7기로 구분하면서 한반도 문화의 자생설 또는 외래 전파설의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는 21세기 한반도-북방 교류사의 새 패러다임을 역설했다. 경북대, 영남대, 서울대 등의 소장 연구자들은 지난해 유라시아연구회를 결성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등의 육해로 교류사 관련 유적 등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정례화하고 있기도 하다.

미술사학계에선 흉노, 선비, 요·금·원 같은 이민족 왕조의 문화가 삼국과 고려 등의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이 지난 3~4년 사이 부쩍 높아지면서 연구 발표와 토론의 자리가 잇따라 개설되고 있다.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지난 2019년부터 북방유목민 문화와 한반도 문화의 역사적 네트워크 재조명이란 대주제 아래 진행해온 장기 학술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첫해에는 고대 유라시아와 중원 일대를 호령했던 흉노족의 ‘샤카 문화’를, 지난해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교역을 벌였던 상인 집단 소그드족의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올해는 ‘북방유목국가 요·금·원 미술문화의 새로운 시각과 탐색’을 주제로 10월23일 1차 학술대회를 비대면 방식으로 중계했고, 다음달 4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차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고대와 중세 한반도를 침략한 오랑캐 정도로만 알려지면서 부정적으로만 인식됐던 옛 북방 이민족들의 문화가 실제로는 삼국과 고려의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 양식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불교미술과 회화사, 건축사 등을 통해 새롭게 고찰한 것이 특징이다. 연구소 쪽은 내후년까지 3년간의 연구 성과들을 엮은 연속자료집 발간도 계획하고 있다.

이 밖에 지난 20일 국내 실크로드학계 권위자 정수일 선생의 미수를 맞아 열린 기념학술대회(한국외국어대)에서는 중앙아시아학회, 한국문명교류연구소 등 12개 실크로드·북방문화 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여 각 기관 활동 현황을 소개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북방 유목국가 학술 프로젝트를 준비한 이송란 덕성여대 교수는 “최근 글로벌 다문화 시대를 맞아 일반인들에게도 과거 역사 속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면서 이미 수년 전부터 학계가 실크로드 연구의 후속작업으로 시도해온 북방 문화사 탐구는 사실상 유력한 흐름으로 자리잡는 추세”라고 말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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