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순자씨가 알려준 세상에 대한 염치

김은형 2021. 11. 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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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사진·윤정희)와 ‘실버취준생분투기’의 이순자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나이 들면서 가져야 할 품위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한다.

김은형|문화기획에디터 

이순자씨가 본격적으로 생계전선에 뛰어든 건 그의 나이 62살. 일하던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은퇴하는 때였다. 그렇다고 평생 살림만 한 건 아니다. 어린이집도 몇년 운영했고, 호스피스 봉사활동도 이십년 넘게 해온데다 미술, 음악, 문학 상담치료의 1급 자격증을 다 가지고 있었다. 중년에 대학에서 문예창작까지 전공해 어린이 독서지도나 글쓰기 수업, 방과후 돌봄, 환자 돌봄, 상담치료 일 등을 기대할 수 있는 ‘스펙’이었다. 하지만 나이 앞에서 그의 두장 가득 채운 이력서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학력을 중졸로 고치고 일자리센터를 통해 구한 수건 정리, 백화점 청소, 공사장 청소를 거쳐 어린이집 주방 담당, 아이돌보미,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 지원사까지 그가 4년 남짓 동안 도전한 일과 직장은 열개가 넘는다. 왜 그는 새로운 일을 배우기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에 이렇게 많은 직업을 갈아치운 걸까. 그 과정을 원고지 160장에 빼곡히 기술한 글이 이순자씨의 ‘실버취준생분투기’다. 대구·경북 지역 <매일신문>이 지난 7월 발표한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올해의 당선작으로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이 글은 대한민국 노년의 현주소에 관한 놀라운 르포르타주다. 생계전선으로 내몰리는 노년층이 늘어나는 가운데 노인의 일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노인 취업률은 어떻게 부풀려지는지, 사용자에게 노인은 얼마나 부리기도 버리기도 간단한 노동력인지 기자의 취재로는 접근할 수 없는 폭과 깊이의 진실을 보여준다. 또한 긴급투입된 요양보호사(작가)에게 도움을 받을 틈도 없이 아픈 몸으로 종처럼 일하는 아내와 주인 같은 남편, 늙고 몸이 불편한 노모를 가족의 동아리에서 밀어내는 자식들, 고단한 삶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만을 요양보호사나 장애인 보조인에게 투사하는 “어쩐지 슬픈” 갑질 등 작가의 눈에 포착된 쓸쓸하고 황량한 노년의 풍경까지 조밀하게 담겨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왼쪽 가슴이 뻐근해지는 건 순자씨의 힘겨운 취업 분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에 대한 염치를 지키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매일의 출근이 그에게는 시험대다. 곤죽이 되다시피 한 오래된 쌀로 밥을 지어 아기들을 먹이라는 어린이집 원장의 ‘명령’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러다가 큰일 날 거 같은 노인의 건강과 집안 문제를 그냥 볼 수 없어 멀리 있는 자식의 연락처를 찾아내 설득한다. 결과는 거의 언제나 순자씨의 업무 중단으로 끝난다.

청소일을 할 때 노련한 짝꿍의 비위를 맞추느라 “시를 쓸 때보다 더 골똘하게” 궁리를 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양미자씨가 떠올랐다.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씨(윤정희)는 나이도, 하는 일도, 관심사도, 서글한 눈매도 이순자씨와 닮았다. 생계를 위해 거동이 불편한 남자 노인을 돌보다가 당하는 성추행과 그 가운데서 느끼는 형편없이 초라한 말년에 대한 착잡한 연민까지도.

양미자씨를 둘러싼 세계와 이순자씨의 그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갑은 말할 것도 없고, 을과 병, 정까지 손쉽게 생각하는 ‘사라져가는 존재’. 이런 여건에서도 두 사람은 자신을 피해자화하지 않는다. 양미자씨가 딸 대신 키우고 있는 손주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주변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위기를 그는 정면으로 마주한다. 손자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수백가지 이유들 안으로 충분히 숨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염치, 이 세계에서 존재했던 피해자에 대한 염치를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 품위를 갖춰야 한다고 한다. 품위는 사회적 위치나 직업적 위계와 등가되기도 한다. 이순자씨의 글은 나이 들면 가져야 할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곱씹게 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강요하는 어떤 믿음에 쉽게 투항하지 않았다. 나이 들면, 가난하면 그냥 이렇게 가는 거라는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품위의 후광을 두른 사람들이 오히려 손쉽게 포기하는 세상에 대한 염치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주 이 글을 발견하고 나는 나이듦에 대한 ‘찐’ 칼럼 필자를 발견했다고 좋아라 하며 곧바로 담당자에게 제보했다. 이순자씨를 만나서 인터뷰도 하고 섭외도 해봐야지 들떠 연락처를 알아보기 시작하고는 곧바로 그가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수상 한달 뒤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 대한 염치라고는 죽을 때까지 단 한순간도 가져보지 못했던 인물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날, 이순자씨의 때 이른 죽음을 다시 한번 애도한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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