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함 속 '개인의 취향'

한겨레 2021. 11. 2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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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들 귀농서신]귀농을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척박함을 걱정하더군요. '그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꿈 깨라.' 얼마 전 제주에 갔을 때 사진가 김영갑 선생님의 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벽에 크게 적혀 있던 글이 인상 깊어 적어왔습니다. "척박함 속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믿었다."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어젯밤 똥꿈을 꿨습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똥을 누고 보니, 삼색 똥이 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또를 샀습니다. 당장 시골에 예쁜 집을 짓고, 여유로운 농부가 되는 상상을 해요. 아내도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로또를 산 친구들에게 가볍게 물어본 “1등 되면 뭐 할래”라는 물음이 많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왔습니다. 열에 아홉은, 일단 서울에 아파트를 산다 해요. 그러고 돈이 남으면 무언가를 하겠지만, 아마 집 사기에도 부족할 거라네요. 여유만 있다면 당연히 시골에들 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 서울에 살고 싶을까요. 친구를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친구는 우선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했어요. ‘쉐이크쉑 버거’를 예로 들어 대답해주더군요. “괴산에는 쉐이크쉑 버거가 없잖냐. 있어봐야 롯데리아일 텐데, 그것이 서울과 시골의 차이다. 스타벅스는? 코스트코는?” 단박에 이해가 됐습니다. 친구는 시골에서 할 일도 딱히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농사 말고 할 게 있냐는 물음에 강남과 괴산 읍내를 번갈아 떠올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집 문제도 한몫합니다. 살 만한 아파트가 없을 거라는 거죠. 관리받으며 사는 편리함을 벗어나서 산다는 것이 절대 편해 보이지 않는다고요. 친구는 아무리 도시살이가 팍팍하더라도 끝까지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취향’이란 단어가 퍼뜩 떠올랐어요.

시골은 도시와 다릅니다. 저는 붐비는 강남 거리를 못 견뎌 합니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의 수제버거보다 한적한 국숫집이 좋아요. 그래서 제가 시골에 가 살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취향 차이구나!’ 살아가는 집도 결국 취향의 문제입니다. 저는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늘 전원주택을 꿈꾸며 살았어요. 언덕 위의 그림 같은 집이라도 어머니 아버지 사시는 것 보면 불편함이 많죠. 창고에 쥐가 들어오고. 한파에 계량기가 얼어붙고. 오래 가물면 지하수가 메마르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버스도 드물어 차도 꼭 필요하죠. 벌레도 많습니다.

저는 그래도 시골집이 좋아요. 차가 필수인 환경이라지만 전기충전소를 직접 마련해 둘 수 있죠. 마당에 텃밭이 있어서 고기 구워 먹을 때면 그저 가서 상추·깻잎 뜯고, 고추 따 와서 그 자리에서 먹죠. 고기도 탁 트인 마당에서 숯불로 구워 먹습니다. 오븐 마련해두면 피자도 직접 합니다. 날이 좋을 때 정원에 요가매트 깔면 어느 요가원보다 좋죠. 층간소음 걱정이 어디 있습니까. 데크에서 줄넘기 뛰고, 누나는 피아노 치고, 아버지는 색소폰 불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느낌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목청 터져라 노래 연습도 합니다. 관리는 못 받아도, 간섭도 없는 괴산 집이 저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보다 좋아요.

최근에 반가운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형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 형도 귀농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멋진 맥주 브루어리와 펍을 만들 계획과 함께더군요. 직접 홉을 기르기 위해 농사교육도 받을 생각이랍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환호가 터졌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어떻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구체적인 귀농의 방향성은 다르더라도, 서울이 아닌 곳에 터전을 잡겠다는 생각을 하는 모습이 반가웠어요. 일을 꾸려가는 방식이나, 부를 쌓아가는 방향성도 결국 개인의 취향인 것 같았습니다. 사업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형은 독립 생산이 쉬운 곳으로 자리를 찾아가는 반면, 안정적인 수익을 좋아하는 친구는 도시에서 돈을 굴리며 살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귀농을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척박함을 걱정하더군요. ‘그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꿈 깨라.’ 얼마 전 제주에 갔을 때 사진가 김영갑 선생님의 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습니다. 그곳 벽에 크게 적혀 있던 글이 인상 깊어 적어 왔습니다. “척박함 속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믿었다.” 척박함 속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저는 개인의 취향으로 이해했습니다. 취향대로 사는 사람에게 척박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힘들더라도 평생 도시에 살고 싶은 친구. 저도 친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살고자 하는 곳이 시골일 뿐이죠. 귀농도 결국 옳고 그름보다 취향의 문제인 듯합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벌어서, 어디서 살지. 현실과 이상의 문제라기보단 선호의 문제입니다. 저는 도시보다 시골이 좋은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척박하지 않은 곳이 어딨겠습니까. 도시도, 시골도 살아내기 퍽퍽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곳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지혜입니다.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바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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