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에 부랑인으로 갇혀..가해자 용서할 기회마저 뺏겼다"

한겨레 2021. 11. 2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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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전두환 사망][형제복지원 인권 유린]
한종선 피해생존자 대표
"지금도 척추분리증 고통 시달려
함께 끌려간 누나는 정신병원 생활"
3만명 피해 추정, 드러난 죽음 551명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한종선씨.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기회도 빼앗겼구나.” 23일 전두환씨 사망 소식을 뉴스에서 본 한종선 (45)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하지 않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구나, 누군가 저걸 보고 배우겠구나, 우리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올 수도 있겠누가, 했죠.” 수용자번호 ‘84-10-3618’번이던 9살 아이는 이제 불혹이 넘었지만, 잘 때 불을 끄지 못한다. “무서워서. 형제복지원에서 소등을 하고 나면 약한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두들겨 맞고 성폭행 당하기도 했어요.”

그의 아버지는 구두닦이였다. 어머니 기억은 없다. 세 살 터울 누이는 그에게 달고나를 만들어주곤 했다. 1984년 10월16일 아버지는 오누이에게 새 옷을 입혀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둘은 검은 지프차에 태워졌다. 형제복지원 행이었다. 나중엔 아버지도 끌려왔다. 1987년 김용원 검사의 수사로 실태가 드러날 때까지, 그는 굶고 맞으며 생존했다. 당시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사람은 3500여명이다. 공식 사망자는 551명이지만 암매장을 봤다는 증언이 여럿이었다. 형제복지원이 부산시가 내 준 땅인 북구 주례동 산18번지 야산에 들어선 1975년부터 따지면, 피해자가 3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지복지원 건물도 수용자들이 강제노역으로 지었다.

악몽은 그의 몸 안에 살아있다. “저는 아직도 밥을 빨리 먹어요.” 형제복지원에서 5분 안에 먹어야 했다. 선착순 몇 명 안에 들지 못하면 맞았다. “아직도 한여름에도 찬물로 샤워하지 못해요.” 또래 아이들과 잠깐 놀다 조장에게 걸린 9살 종선 씨는 한겨울 발가벗겨져 물고문을 당했다. “수술을 두 번 했는데 아직도 허리가 아파요.” 너무 맞아 척추분리증에 시달린다.

누이(48)와 아버지(74)의 시간은 형제복지원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직 정신병원에 있다. “누나는 9살 때 제 사진은 알아봐요. ‘내 동생 종선이 아이가.’ 그런데 나이든 저는 자기를 감시하러 온 형제복지원 조장이나 소대장인줄 알 때가 있어요.” 1987년 종선씨는 서울 소년의 집으로 보내졌다. 누이와 아버지 소식은 2007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지난 2018년 9월5일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가 인터뷰에 앞서 국회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소년의 집을 나온 뒤 구두공장에 취직했다. 사장은 식사 때 “밥 같이 먹자”고 말해줬다. 종선씨는 그가 가족같이 대해준다고 느꼈다.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했다. 사장은 주민등록증이 없던 종선씨 임금을 떼먹었다. 5년 일하고 임금 달라고 하니 “경찰에 신고해 복지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겁나서 도망쳤어요. 혹시라도 또 돌려보낼까봐. 피해 당사자들은 외롭게 살아오다보니 누구 하나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기 약점인지도 모르고 다 이야기하게 돼요.”

그는 왜 전두환씨에게 사과를 요구해왔을까? “박인근 원장 혼자 사회정화사업 했나요? 국가 정책이었잖아요. 국가가 키웠고 비호했잖아요.” 형제복지원은 연 10억~20억원 (당시 금액) 국가보조금을 받았다. 전두환씨는 대통령이던 1981년과 1984년 박인근 원장에게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부랑인 격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이를 ‘치적’으로 내세운 건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1960년 형제육아원에서 시작한 형제복지원이 1971년 부랑인시설로 탈바꿈 하고 1987년 3천여명을 수용하는 시설로 몸집을 키운 데는 국가의 뒷배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훈령 410을 발표했다. 훈령은 “걸인, 껌팔이 등 건전한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부랑인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하라고 명시했다. 국가가 감금을 승인한 꼴이다. 내무부 훈령이 제정된 해에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으로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보호 사업 위탁계약을 맺는다. 박인근 원장은 이 훈령을 근거로 불법감금 등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고 횡령 등만 인정돼 2년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다. 형제복지지원재단에 복귀해 2011년 이사장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형제복지원 재단은 중증장애인 시설 등을 운영하며 2015년 부산시가 법인허가를 취소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바닥에 앉아 있는 사진. 박인근 회고록에 실린 사진으로, 찍힌 장소와 시점 설명은 쓰여 있지 않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 제공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 격리 정책을 확대했다. 1981년 ‘부랑인 복지시설 운영개선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1984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민간 시설에 보조금, 세제 혜택을 늘렸다.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관광객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사회정화’ 공무원을 1만 명 투입하는 등 단속을 강화했다. “국민의 안녕”을 위한 ‘사회정화 사업’은 치적으로 홍보됐다. 형제복지원엔 기회였다. 정부가 알아서 강제노역시킬 수 있는 인력을 공급해주는 셈이었다. 수용자들을 동원해 기업체와 손잡고 수익사업을 벌였다. 정부로서는 값비싼 복지 확대 대신 싼 값에 취약계층을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지만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다. 1986년 말만 따져도 부랑인 시설 36개소에 1만6천명이 수용됐다. (김일환 <복지는 어떻게 사업이 되는가: 사회복지법인의 역사로 본 형제복지원>, ‘배제에서 포용으로: 형제복지원의 사회사와 소수자 과거청산의 과제’ 토론회 자료, 2018년 11월. 등 참고.)

2012년 종선씨는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모두 지나쳤다. 전규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만 멈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제가 전규찬 교수님을 못 만났다면, 지금 전화로 인터뷰하고 있는 당신도 부랑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기사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요. 1년 일인 시위 해보고 안 되면 대형교회부터 폭파하려고 했어요. 원망이 너무 컸어요. 박인근 원장이 장로였거든요. 하나님 이름 팔아서 사람을 감금하고 때려죽였어요.” 그는 전규찬, 박래군과 함께 책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을 썼다. 대책위가 꾸려지고 긴 싸움의 시작됐다. 피해생존자들은 특별법과 과거사정리법 통과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400일 넘게 천막농성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과거사위원회가 피해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진상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사과하고 피해배상 해야죠. 용서를 하려면 가해자가 진심을 다해 사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런 사과를 보지 못했어요.” 그의 바람은 이런 날이 오는 것이다. “누나, 이제 집에 가자.”

김소민 자유기고가 monduck20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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