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육사 11기

안용현 논설위원 2021. 11. 24.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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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왼쪽), 노태우 전 대통령. /조선일보 DB

1946년 개교한 육사 1~9기는 40여 일에서 6개월 교육만 받고 임관했다.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1949년 2년제로 입학한 10기(생도 1기)는 6·25가 터지자마자 전장에 투입됐다. 1950년 생도 2기는 입교 한 달 만에 참전해 동기생의 43%가 전사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1기 200명이 경남 진해에서 입학했다. 미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4년제 첫 정규 육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제야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선배들과 달리 참전하지 않고 1955년 소위가 됐다.

▶육사 11기부터 미국으로 군사 유학을 갔다. 초급 장교 시절엔 군 부패 척결에도 앞장섰다. 집단적 엘리트 의식과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의 지지 시위를 놓고 첫 분열이 생겼다. 전두환 대위 그룹은 시위 찬성, 육사 교수부의 동기들은 반대가 많았다.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11기인 전두환·김복동·손영길·최성택 소령, 노태우·권익현 대위 등을 군 요직에 기용했다. 11기가 주도한 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일러스트

▶1973년 4월 군 실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 후계’ 등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박 대통령과 함께 11기를 총애하던 윤필용의 몰락으로 11기는 위기를 맞았다. 선두였던 손영길 준장과 권익현 대령 등이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 군복을 벗어야 했다. 당시 보안사가 하나회를 이끌던 전두환 준장 등도 조사하려 했지만 권력 내부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파동에서 살아남은 11기가 신군부를 이끌며 1979년 12·12 쿠데타 주역이 된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후 노태우 등이 군복을 벗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11기가 정치와 군으로 나눠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11기는 12년 넘게 군대는 물론 정치 권력의 핵심이었다. 11기인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은 국방장관을 거쳐 6공 때는 재선 의원을 했다. 중장으로 예편한 김복동도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하나회 라이벌 ‘청죽회’ 출신인 이상훈도 국방장관을 했다.

▶노태우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별세했다. 11기는 두 대통령을 포함해 대장을 5명 배출했다. 중장·소장만 20명에 달한다. 장관급과 국회의원도 수두룩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육사 11기만큼 권력의 영욕(榮辱)을 오래 겪은 집단도 없을 것이다. 70년 전 전쟁 중인 나라의 사관생도로 입교할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역사의 페이지도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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