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쓸모없음의 쓸모

이영숙 동양고전학자·'사랑에 밑줄 친 한국사’ 저자 2021. 11. 24.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애물단지.’

바람이 부쩍 쌀쌀해져 차갑게 느껴지는 이때, 여전히 치워지지 않은 채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선풍기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 폭염과 무거운 습도를 견디게 해줬던 고마운 존재였는데, 날개를 일일이 닦고 커버에 잘 담아 보관할 생각을 하니 그만 귀찮아진다. 흔들대는 목, 회전할 때의 소음이 거슬리니 이참에 버리고 내년에 다시 살까, 갈등이 생긴다.

/일러스트

문득 가을 부채를 말하는 ‘추선(秋扇)’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쓸모없어진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중국 전한(前漢) 시대 성제의 후궁 반첩여의 시에서 유래했다.

‘당신 품과 소매 속 드나들며 흔들어서 미풍을 일으켰었는데/ 두려워요, 곧 가을이 와서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면/ 상자 속 버려진 신세 되어 은애하는 마음 끊어질까봐.’

지혜롭게 왕을 보필하며 총애를 받던 반첩여는 화려한 매력을 지닌 새 후궁 조비연의 등장에 바로 외면당한다. 그 처지를 한여름에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서늘한 가을이 되자 용도 폐기된 부채에 빗댄 것이다.

쓸모에 따라 사람도 물건도 잊히고 버려지는 게 운명일까?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3000명이 넘는 맹상군의 식객 중에는 닭 울음소리(계명)를 잘 내는 사람과 개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구도)이 있었다. 그들은 주변으로부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이란 손가락질을 받곤 했다. 그러나 맹상군이 진(秦)나라에 잡혀 갔을 때, 개 흉내를 내며 귀한 가죽옷을 훔쳐 탈출의 기회를 마련하고, 닭 울음소리로 성문을 열게 하여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은 그 두 사람이었다.

이 고사는 되돌아보게 한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보잘것없음의 가치를, 버려질 물건과 멀어진 관계의 재정립을. 선풍기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진다. 선풍기 날개를 해체해 닦으며 쓰다듬어 본다. 올해 참 고마웠고, 내년에도 잘 부탁해.

동양 고전학자 이영숙 박사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