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쓸모없음의 쓸모
‘이런 애물단지.’
바람이 부쩍 쌀쌀해져 차갑게 느껴지는 이때, 여전히 치워지지 않은 채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선풍기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 폭염과 무거운 습도를 견디게 해줬던 고마운 존재였는데, 날개를 일일이 닦고 커버에 잘 담아 보관할 생각을 하니 그만 귀찮아진다. 흔들대는 목, 회전할 때의 소음이 거슬리니 이참에 버리고 내년에 다시 살까, 갈등이 생긴다.
문득 가을 부채를 말하는 ‘추선(秋扇)’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쓸모없어진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중국 전한(前漢) 시대 성제의 후궁 반첩여의 시에서 유래했다.
‘당신 품과 소매 속 드나들며 흔들어서 미풍을 일으켰었는데/ 두려워요, 곧 가을이 와서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면/ 상자 속 버려진 신세 되어 은애하는 마음 끊어질까봐.’
지혜롭게 왕을 보필하며 총애를 받던 반첩여는 화려한 매력을 지닌 새 후궁 조비연의 등장에 바로 외면당한다. 그 처지를 한여름에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서늘한 가을이 되자 용도 폐기된 부채에 빗댄 것이다.
쓸모에 따라 사람도 물건도 잊히고 버려지는 게 운명일까?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3000명이 넘는 맹상군의 식객 중에는 닭 울음소리(계명)를 잘 내는 사람과 개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구도)이 있었다. 그들은 주변으로부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이란 손가락질을 받곤 했다. 그러나 맹상군이 진(秦)나라에 잡혀 갔을 때, 개 흉내를 내며 귀한 가죽옷을 훔쳐 탈출의 기회를 마련하고, 닭 울음소리로 성문을 열게 하여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은 그 두 사람이었다.
이 고사는 되돌아보게 한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보잘것없음의 가치를, 버려질 물건과 멀어진 관계의 재정립을. 선풍기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진다. 선풍기 날개를 해체해 닦으며 쓰다듬어 본다. 올해 참 고마웠고, 내년에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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