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펑솨이 실종 논란이 남긴 것
[경향신문]
중국 테니스 선수 펑솨이(彭師)의 행방에 관한 기사가 며칠 새 국내외 언론을 달궜다. 펑솨이는 2014년 중국인으로는 처음 여자 복식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테니스 스타다. 최근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미투(MeeToo)’ 선언 때문이다. 펑솨이는 지난 2일 중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웨이보에 장가오리(張高麗) 전 중국 부총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글을 올렸다. 장가오리는 2018년 은퇴 전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권력 서열 7위였다.
스포츠 스타의 전직 최고위급 지도자를 상대로 한 미투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펑솨이의 폭로 글은 30분도 안 돼 지워졌고, 중국 언론은 침묵했다. 사건은 수면 아래 가라앉는 듯했지만 세계여자테니스협회(WTA)가 펑솨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곧이어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국제적 이슈로 비화됐다. SNS에서는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들이 동참한 가운데 ‘펑솨이는 어디 있나’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됐다.
침묵하던 중국 관영매체들이 뒤늦게 SNS를 통해 그의 근황을 공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유엔과 미국, 영국 등 국제사회에서 펑솨이의 신변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도 펑솨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경고성 발언이 나왔다. 그의 실종 논란이 국제적인 스포츠·외교 사안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논란은 지난 21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펑솨이와 30분간 영상 통화를 하면서 안전을 확인한 사실을 공개한 뒤에도 이어지고 있다. 일단 펑솨이가 실종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은 확인됐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그가 당국의 감시와 강압적 상황에 놓여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펑솨이 논란은 중국의 국가·사회 시스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반체제 인사 등에 대한 자의적 구금을 일삼고 문제가 불거지면 감추고 짓누르기에 급급한 권위주의적이고 불투명한 시스템이 초래한 결과다. 언론 통제의 단면도 그대로 드러났다. 성폭행 피해 호소 이후부터 실종설이 불거진 시점까지 중국 언론에서는 그에 관한 기사를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억명의 사용자를 자랑하는 SNS에서도 펑솨이와 장가오리의 이름은 철저히 지워졌다. 국제사회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관영매체의 펑솨이 근황 공개도 중국에서 차단된 트위터를 통해서만 이뤄졌다. 펑솨이의 성폭행 폭로나 실종 논란 자체가 중국 내부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펑솨이 사태는 중국에서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일깨웠다. 펑솨이의 폭로는 그의 말처럼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는 폭력에 맞서려는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펑솨이 같은 스타라면 중국에서 미투 폭로에 대한 저항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도 정치·사회·스포츠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통제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됐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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