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 피울음, 끝까지 사죄는 없었다

이승준 2021. 11. 2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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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암흑의 현대사 쓴 전두환 사망
광주 학살·군부독재 폭압..야만의 역사
한점 참회도 없이 떠나 "왜 그에게 책임을 묻나"
전두환쪽은 마지막까지 고통과 모멸감 안겨
1980년 5월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희생자들이 묻혔던 망월동 옛묘역에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나경택(5·18기념재단) 제공

끝내 반성도 사과도 없는 마지막이었다. 그의 죽음을 알린 측근은 1980년 5월 광주학살 책임을 왜 그에게 묻느냐고 따졌고, 1980년대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은 또 한번 고통과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12·12 군사반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향년 90. 지난달 26일 노태우씨에 이어 전씨까지 사망하면서 1961년 5·16 군사반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반공보수기득권 연합의 짙은 그림자를 남긴 군사독재의 주요 인물이 모두 세상을 떴다.

1931년 1월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사 11기로 소위 임관했다. 전씨는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박 소장을 찾아가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쿠데타 지지 시가 행진을 하겠다’고 건의해 신임을 얻는다. 이후 1974년 육사 11기 최초로 준장에 진급한 뒤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1976년), 국군보안사령관(1979년) 등 요직을 맡는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 노태우 등 육사 11기 5명과 오성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로 발전한다. 전씨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숨지자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뒤, 하나회 세력을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이듬해 5월17일 시국수습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이에 반발한 광주시민들을 유혈 진압했다. 전씨는 2017년 회고록 등을 통해 당시 발포 명령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80년 8월 ‘체육관 선거’로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릅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헌법 개정을 거쳐 이듬해 2월 제5공화국 1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전씨가 이끈 신군부 세력은 군홧발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았다. 언론통폐합을 통한 보도통제를 했고, ‘사회정화’ 이름 아래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 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 다치고 죽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요구가 폭발했지만, 전씨는 대통령 간선제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결국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5공화국 몰락으로 이어졌다.

친구 노태우씨를 후계자 삼아 권력을 휘두르려 했던 전씨는 19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5공 비리 및 광주학살 진상조사를 받게 된다. 1988년 11월23일 전씨는 대국민 사과와 연희동 집 등 국가 반납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와 함께 백담사로 들어가며 처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12·12 군사반란 및 5·18 유혈 진압에 대한 수사·재수사가 진행됐고, 결국 1995년 12월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다. 이듬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그의 특별사면을 합의한 뒤 석방한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국가폭력 피해자 등에게 사죄하거나 참회하지 않았다. 대신 죽기 전까지도 광주의 법정에 서야했다. 2017년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헬기 사격을 두고 고 조비오 신부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그는, 지난해 11월 광주지법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알츠하이머 등 건강 문제를 들어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던 그는 재판이 열리는 날 골프장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씨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침 8시45분께 자택에서 화장실을 가던 중 쓰러졌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없었다. (집에는) 이순자 여사만 계셨다”고 전했다. 전씨의 주검은 오후 2시50분 수많은 시위대가 진입을 시도했던 연희동 집을 떠나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주요 외신은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사독재자가 죽었다”(<뉴욕타임스>)고 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발인은 27일 오전이다. 유족들은 전씨를 화장한 뒤 휴전선 근처에 안장하길 희망한다고 한다. 유족은 아내 이순자씨,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이승준 박지영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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