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할많하않' 무당층의 속앓이

한겨레 2021. 11. 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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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공학도인 한 지인으로부터 "왜 걸핏하면 정치공학 운운하냐?"며 공학이란 용어가 그렇게 쓰이는 게 매우 모욕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학이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실용적 해법을 찾는 과학인데, 왜 혹세무민의 소모적 정쟁을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냐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정치공학'이다. 스스로 주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을 뒤집고 개혁에 역행하는 대증요법이나 용두사미로 끝날 선심성 공약 말고, 실질적 해결책이 될 전환적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이진순ㅣ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할많하않’이란 속어가 있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란 뜻의 줄임말이다. 아무 말이나 줄여 쓰는 언어 행태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할많하않은 그 의미와 줄임말의 형태가 묘하게 잘 어우러진다. ‘말해봤자 먹힐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내 입을 다문다’는 소극적 저항과 냉소가 네 글자로 건조하게 압축된 줄임말 안에 고집스레 담겨 있다. 지지 정당도 없고 지지 후보도 없다는 이른바 무당층의 요즘 심정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지지율 추이만 줄기차게 쫓는 여론조사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기존 여론조사는 주어진 답안지 안에서 지지 후보를 고르라고만 하지, 왜 지지 후보가 없냐고 좀처럼 묻지 않는다. 무당층에게 그걸 묻는다면 정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양당 후보 모두 비리와 부패 공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 누굴 믿을 수 있겠냐는 회의론도 있을 수 있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임기 내내 비리 의혹에 대한 정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니 앞날이 요원하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 개명, 차별금지법 유보, 탈탄소 전략 부재 등 후보 간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으니 도긴개긴 아니냐는 투표무용론도 있을 것이다.

무당층의 비율은 20대와 30대에서 가장 높다. 한국갤럽이 지난 16~18일 실시한 정례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선 주자 4자 구도에서 지지 후보가 없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14%인데, 18~29살의 29%, 30대의 20%가 여기 해당하고 직업별로는 학생의 22%, 사무관리직의 20%가 무당층이다. 지지 후보를 선택한 경우에도 최종 선택은 극히 가변적이다. 한국갤럽이 <머니투데이> 의뢰로 11월8~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다른 사람 지지로 바꿀 수도 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34.5%인데, 20대 이하는 69%, 30대는 61%에 달해 평균치의 두 배에 근접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후보마다 청년세대 부동층 잡기에 혈안이다. 이재명 후보는 연간 200만원의 청년기본소득 제공, 기본주택 우선 배정 등에 더해 취업 면접에 드는 비용을 지원하고 면접수당을 제공한다는 공약까지 내놨다. 윤석열 후보는 저소득층 청년에게 월 50만원씩 최장 8개월간 청년도약보장금을 지원하고 연간 250만원 한도 금액을 국가가 보조하는 청년도약계좌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공약들이 ‘청년세대는 이념과 진영에 구애받지 않고 실리를 따른다’는 가설을 저급하게 해석한 결과는 아닐까? 실리를 따른다는 것이 돈만 주면 해결된다는 뜻은 아닐 텐데 말이다.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사안별로 실리적 해법을 지지한다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시민윤리이다. ‘묻지 말고 ○○당’, ‘닥치고 ××대통령’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전근대적이다. 청년세대는 역사의식이 없고 정치에 무관심하니 온정적 쇼맨십과 감성적 퍼포먼스로 접근하면 넘어올 것이라는 해석도 안일한 오독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치에 관심 없다’고 답한 청년층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도 야도 다 한통속의 특권층’이라는 청년층의 불신이 ‘난 정치 따위에 관심 없어’라는 위악적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47%, 69%에 그쳤지만 촛불항쟁 이후에 실시된 19대 대선에서는 76%로 껑충 뛰어올랐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청년들의 정치적 관심도 높아진다.

공학도인 한 지인으로부터 “왜 걸핏하면 정치공학 운운하냐?”며 공학이란 용어가 그렇게 쓰이는 게 매우 모욕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학이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실용적 해법을 찾는 과학인데, 왜 혹세무민의 소모적 정쟁을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냐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정치공학’이다. 스스로 주장하는 정치적 정체성을 뒤집고 개혁에 역행하는 대증요법이나 용두사미로 끝날 선심성 공약 말고, 실질적 해결책이 될 전환적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부동산 불평등, 취업난, 자영업 몰락을 해결할 장기 대책은 무엇인지, 법망 바깥에 있는 영세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들을 어떻게 생존의 벼랑 끝에서 구할지, 기후위기의 절박한 일정 속에서 어떻게 강도 높은 탈탄소 전략을 실행할 것인지, 적대적 공생 상태로 이어온 거대 양당의 기득권 카르텔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희망의 단초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에서 할많하않 무당층의 마음을 여는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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