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의 고통, 창작의 촉매

최재봉 2021. 11. 23. 18: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 _05 마감

마감은 작가의 호흡이자 숙명과도 같다. 시나 중단편소설은 잡지에 먼저 발표하고 일정한 분량이 차면 단행본으로 묶는 것이 일반적이다. 잡지 연재나 발표를 거치지 않고 단행본으로 곧바로 출간하는 경우라 해도 출판사나 편집자에게 약속한 마감 시점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작가에게 부담과 압박감을 준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거의 모든 과정에 마감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쓸 수 없는 날에는 아무리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나는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실 안이다. 아니, 볼일도 없는데 여긴 뭐 하러 들어왔지. 밖으로 나오다 이번에는 격자문에 머리를 내리친다. ‘으음, 으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따위 글을 써봤자 뭐가 된단 말인가. 그저 노동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 요코미쓰 리이치라는 일본 작가가 1927년 어느 잡지에 기고한 산문의 일부다.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라는 부제를 단 책 <작가의 마감>에 실려 있다.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를 비롯해 20세기 전반기 일본 작가들이 마감에 관해 쓴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마감이 임박했을 때 느끼는 압박감, 어떻게 해서든 마감에 맞춰 원고를 끝내고자 하는 몸부림, 마감이라는 굴레에 갇혀 허덕여야 하는 운명에 대한 저주, 그럼에도 어찌어찌해서 마감을 끝내고 난 뒤에 맛보는 홀가분한 만족감 그리고 다시 다음 작품에 착수하고 싶다는 신선한 의욕 등 마감을 둘러싼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마감은 작가의 호흡이자 숙명과도 같다. 마감의 압박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경우는 물론 신문이나 잡지처럼 발행 일자가 정해진 매체에 일정한 분량의 원고를 때맞춰 넘겨야 할 때일 것이다. 요즘은 아예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신문이 연재소설을 실었고, 역사물 하나에 현대물 하나 이런 식으로 두 편을 동시 연재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신문 연재소설에는 매회 삽화도 들어갔기 때문에 작가는 신문 발행 시점만이 아니라 삽화가가 그림 작업을 할 시간도 감안해서 미리 원고를 마감해야 했다. 그 시간에 대서 원고를 마치지 못할 경우에는 해당 회차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려주고 그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도록 하거나, 아예 구체적인 이야기나 장면과 무관하게 막연한 분위기를 담은 삽화를 그려서 넣기도 했다. 삽화 작업에 필요한 시간은커녕 신문 발행을 위한 최종 마감 시각까지도 원고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럴 경우 신문사는 그동안 연재된 내용을 간추려서 환기시켜 주는 ‘줄거리 요약’으로 지면을 메꾸기도 했다. 심지어는 작가 대신 담당 기자가 한 회분을 대필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도 있다.

인터넷은 물론 팩시밀리도 등장하기 전, 원고지 시대의 담당 기자들은 연재소설 작가의 집에 가서 육필 원고를 받아 오는 일이 허다했다. 소설가 황석영이 전남 해남에 살면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던 시절에는 우체국에서 신문사로 원고를 부치고는 했는데, 마감이 밭을 때에는 버스 터미널에 가서 서울행 버스 승객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골라 원고 ‘배달’을 부탁하기도 했다. 작가 김훈이 담당 기자였던 어느 날은 휴가 나왔다가 귀대하는 병사 편에 원고를 맡겼는데, 귀대 시간에 쫓긴 병사가 원고를 지닌 채 근무처인 육군본부로 들어가 버리자 김훈 기자가 찾아가서 원고를 회수해 오는 일도 있었다. 김훈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여전히 원고지에 손글씨로 작품을 쓰는 조정래가 <한겨레>에 대하소설 <아리랑>과 <한강>을 연재할 때에는 팩시밀리로 원고가 들어왔는데, 문학 담당 기자만이 아니라 문화부의 다른 기자들까지 동원돼서 원고를 입력하고는 했다.

이제 신문 연재는 거의 사라졌다지만 문예지나 온라인의 장편 연재는 여전하다. 시나 중단편소설은 잡지에 먼저 발표하고 일정한 분량이 차면 단행본으로 묶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가들은 여전히 마감의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설사 잡지 연재나 발표를 거치지 않고 단행본으로 곧바로 출간하는 경우라 해도 출판사나 편집자에게 약속한 마감 시점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작가에게 부담과 압박감을 준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거의 모든 과정에 마감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이고 누구보다 그 일에 특화된 작가들이 마감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한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정은 그와는 전혀 딴판이다. “작가란 다른 누구보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토마스 만의 단편 ‘트리스탄’의 한 대목을 참조해 보자. 작가가 여느 사람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이 곧 그가 글을 쉽게 쓴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의 글이 잘 쓴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만큼 힘들게 썼기 때문일 수 있다.

“가끔 어떤 대목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섰다가 앉았다가 마셨다가 피웠다가를 점점 더 자주 되풀이한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5분이나 10분 가만히 원고를 노려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번에는 차를 마시고 또 노려본다. 그래도 안 풀리면 소변보러 나갔다가 내친김에 정원까지 걸어 다닌 뒤 돌아와 또다시 원고에 매달린다. 꽤 심하게 막힐 때는 원고가 나를 뒤엎어버리는 느낌이라, 후유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응시한 채 반 시간에서 한 시간을 허비한다.”

역시 <작가의 마감>에 실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글 한 대목이다. 다니자키 같은 탐미주의 소설의 작가도 그렇게 글쓰기에 애를 먹었던가, 하고 묻지 말기 바란다. 글이 아름답고 정교할수록 작가의 고뇌와 몸부림 역시 자심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 좀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글이란 써도 써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쓸 때마다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고 두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평론가 이명원의 산문집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에 그 점이 잘 나와 있다.

“문인들은 ‘쓴다’는 행위 속에 갇힌 수인이다. 글이 쓰여지지 않을 때, 그는 절망하며, 글을 쓰는 순간 그는 좌절한다. 글쓰기를 중단하는 순간 그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며, 글쓰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무능을 끊임없이 질책한다. 쓴다는 일을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는 문인들이 많은데, 이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글쓰기가 너무도 힘든 나머지 공원에서 잠자리를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거나(호리 다쓰오), 잊었던 위경련이 다시 생기거나(사카구치 안고), “아, 싫다, 싫어! 소설 따윈 쓰고 싶지 않아”라며 애꿎은 아내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다야마 가타이). 역시 <작가의 마감>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따로 작업실이 없이 집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마감에 쫓길 때 집안은 가히 비상 상태가 된다. 작가 자신을 제한 나머지 모든 가족 구성원은 말은커녕 숨소리조차 최소화한 채 오로지 글쓰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샤이닝>에서 잭 니컬슨이 연기한 작가 주인공이 글에 집중한답시고 아내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장면은, 다소 과장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적잖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일 것이다.

글쓰기와 마감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은 왜일까. 모종의 피학 취미 때문일까. 젊은 작가 김초엽은 지난해 <한겨레21>과 한 인터뷰에서 “마감이 닥쳐왔을 때 발휘되는 창의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똥줄이 타도록 마감에 쫓겼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문장이 떠오르며 글이 술술 풀렸다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종종 듣게 된다. 마감은 창작의 촉매요 뮤즈로 구실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분간은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 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작가의 마감>에 실린 아쿠타가와의 고백이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학질을 떼는 심정으로 마감을 했음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다시 그리워져서는 같은 과정을 곱다시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마감이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지. 아쿠타가와는 비록 ‘천벌’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천상의 보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채지 못할쏘냐. 그래서, 그 덕분에, 글쓰기는, 그리고 문학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진다는 해피엔딩인 셈인가.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30년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