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 낮춰도 "여기 왜 쓰셨어요"..고스펙 취준생 두번 운다

박홍주 2021. 11. 2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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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취업시장 화두는 '퇴준생'
중견기업 "뽑아봐야 큰데 옮겨"
서류심사때부터 고스펙 걸러내
구직자 90% 눈높이 낮춰 지원
"일부러 경력 더 빼야하나 답답"

취업준비생 임재혁 씨(27·가명)는 지난달 한 중견기업 면접에서 "부족할 게 없는 스펙인데 우리 회사에서 경력만 쌓고 이직하려는 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임씨는 대기업 공개 채용을 노리다가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시고 중견기업으로 눈을 돌린 상황이었다. "회사에 끝까지 남아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답했지만 결국 임씨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임씨는 "이직은커녕 눈앞의 취업이 급한데 스펙이 좋다는 것까지 문제 삼으니 억울하다"며 "이력서를 쓸 때부터 자격증이나 인턴 경력을 일부러 빼놓아야 하나 싶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23일 매일경제가 취재한 결과, 취업난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임씨처럼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다가 중견·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가 이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취업 플랫폼 기업 잡코리아가 발표한 '취업 눈높이 현황'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구직자 중 88.5%가 '현재 눈높이를 낮춰 지원하고 있거나, 그럴 생각이 있다'고 응답했다. '눈높이를 낮춰 구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취업이 안 되면 더 낮추겠다'는 응답도 30%에 달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눈높이를 낮춘 구직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지 않고 있다. 막상 뽑아 놓고 보면 곧바로 좀 더 큰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근무에 불성실하게 임하는 신입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퇴준생(퇴직+취업준비생)'이 인사 담당자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통하고 있는데, 지난 6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직장인 14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37.5%가 스스로 "퇴준생이 맞는다"고 답했다. 퇴준생은 목표를 낮춰 입사한 후 곧바로 이직을 준비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문제는 퇴준생이 급증하는 추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여전히 대기업 채용이 얼어붙어 있고 수시 채용이 공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경향은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9월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매출액 500대 기업 중 67.8%가 하반기 신규 채용이 없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 명도 뽑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도 13.3%에 달했다. 공채 문이 좁아지면서 취업준비생으로서는 "일단 어디든 들어가고 보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눈을 낮춰 입사지원서를 쓰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취업과 동시에 더 나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준비한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고승호 씨(26·가명)는 "대학생이 '반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직장인들도 누구나 더 나은 직장에서 일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퇴준생이 나름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렇기 때문에 중견·중소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고스펙' 지원자를 걸러내는 방식으로 채용을 진행하고 있다. 중소·중견기업은 자신들을 대기업으로 '점프'하기 위해 잠시 거치는 징검다리로 여길까 봐 눈높이를 낮춘 지원자를 서류 심사 때부터 걸러낸다. 실제로 동종 업계 중견기업에서 인턴한 경험을 들어 중소기업 면접에서 퇴짜를 맞는 사례도 있다.

대학교를 다니며 정보기술(IT) 업계 중견기업 인턴 경험이 있는 이성희 씨(25·가명)는 졸업 후 같은 업계 중소기업에 지원했다. 면접에서 "같은 업계의 더 큰 회사에서 일해봤는데 우리 회사에 다니면 성에 차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이씨는 이후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는 "스펙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불합격 이유가 되니 황당하다"고 토로했다.

기업들의 고충도 있다.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조기 퇴직하면 채용과 교육에 들였던 비용이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한 중견기업 인사팀 채용 담당자는 "스펙이 좋은 지원자일수록 조기 퇴직하거나 이직할 리스크를 감안하고 뽑을 수밖에 없다"며 "기껏 훈련을 마친 신입사원이 퇴사하면 훌륭한 인재를 잃었다는 아쉬움보다도 누군가가 빈자리를 갑자기 메워야 한다는 부담이 앞선다"고 밝혔다.

윤지환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회사 입장에서 면접자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면접자 입장에서도 어떻게 경력을 개발하고 성장할 수 있을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지원자는 회사의 미래 비전에 대한 정보를, 회사는 지원자의 업무 열의와 지속 여부를 볼 수 있도록 면접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홍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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