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AS] 푸틴의 '30년 원한', 유럽 흔드는 동시다발 위기로

이본영 2021. 11.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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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러시아 변경 동시다발 위기 전운 형성
폴란드-벨라루스 국경 이주민 문제로 충돌
2014년 분쟁 우크라이나 국경 러시아군 집결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분리독립 움직임 재개
갈등 배경엔 나토 동진에 대한 푸틴의 분노
민족주의는 장기 집권 추진력으로도 쓸모
중국 견제 집중하던 미국 '이중고' 빠져
스프레드팀_뉴스AS. 그래픽_진보람

2007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한 서구 국가 관계자들은 한 연설자의 작심 발언에 표정이 굳어졌다. 말머리에서 강도 높은 발언을 예고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하나의 권력 중심, 하나의 무력 중심, 하나의 의사 결정 중심, 이게 세계의 주인이자 군주가 됐다”며 미국을 신랄히 성토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는 국제관계에서 거의 자제하지 않는 군사력의 흥분된 사용을 목격하고 있다”며 냉전 종식 후 미국이 구축한 단극 체제를 비난했다. 백악관은 이 연설에 “충격적이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9년 12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 분쟁 해소를 논의하려고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부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파리/로이터 연합뉴스

지지자들이 ‘뮌헨 연설’이라며 기념하는 푸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더는 주눅 들지 않고 미국에 맞서는 새로운 러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포고문이었다. “정치적 해결은 불가능해졌다”고 선언한 그는 이듬해 이웃의 소국 조지아 침공을 결정했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고, 중동에서도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다.

러시아 변경 동시다발 위기

2021년 11월 현재 러시아와 유럽의 경계 지대에서 동시다발적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서는 러시아의 형제국 벨라루스가 유럽으로 보내준다며 불러들인 중동 이주민들을 놓고 유럽연합(EU)까지 얽힌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개입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폭격기와 공수부대를 벨라루스에 보내 무력시위를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 약 10만명이 국경에 집결하자 전쟁 공포에 떨고 있다. 2014년부터 동부 돈바스 지방에서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친러시아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충돌로 양쪽에서 1만3천명이 사망했는데 훨씬 강력한 적이 다시 접근하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3일 <로시야1>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재공격 가능성에 대해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3~4월에도 병력을 집결해 비슷한 위협을 가한 러시아가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고 본다.

1990년대에 참혹한 전쟁터로 변했던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도 심상찮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공동 대통령 밀로라드 도디크는 지난달 세르비아계 자치 지역인 스릅스카공화국의 사실상 독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슬림계,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가 내세우는 3명의 공동 대통령이 통치하는 체제에서 세르비아계가 다시 독립을 추진한다는 것은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에 어긋난다. 내전의 주요인이었던 세르비아계의 범슬라브주의 재발 움직임은 혈통이 비슷한 러시아가 한 배경으로 지목된다.

이 가운데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는 상황이 주변국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는 8일과 10일 각각 외교장관을 워싱턴에 보내 대책을 논의했다. 지난달 말부터 지중해를 맡는 미국 제6함대 기함과 구축함은 흑해에 진입해 훈련하며 조지아와 루마니아 항구도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은 18일 나토 폭격기들이 “아주 심각한 무기”(핵무기)를 싣고 러시아 영토 근처로 비행했다고 주장하며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다.

“지정학적 재앙”과 푸틴의 대응

러시아 주변 지역을 둘러싸고 최근 대립과 긴장이 고조되는 이유를 찾으려면 역사의 시계침을 1991년으로 돌려야 한다. 1989년 12월 미-소의 지도자가 몰타에서 만나 냉전 종식을 선언하며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나토는 과거 소련권 안보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을 끌어들이며 러시아 국경까지 진출했다. 소련이 독일 통일에 동의하면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미국이 깬 것이다.

2000년 권좌에 오른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에는 ‘강한 소련’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는 2005년 연설에서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했다. 나토의 현상유지라는 약속을 저버린 미국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은 2007년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서 “나토 확장은 동맹 현대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이런 확장은 누구를 겨냥하나”라고 따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동독 드레스덴에서 시위 군중과 맞닥뜨린 푸틴 대통령의 좌절이 원초적 반감을 형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그는 드레스덴 주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과거의 소련의 영광 상실뿐 아니라 ‘전략적 종심’이 훼손된 사실을 개탄한다. 그가 존경한다는 표트르 대제(1672~1725)가 최초로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광활한 국토 자체가 러시아의 중요한 안보 자산이며, 국경은 중심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이나 2차대전에서 유효성이 입증됐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각각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파죽지세였으나 길어진 병참선과 혹독한 날씨, 러시아의 끈질긴 저항에 결국 패퇴했다.

흑해에 진입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전함 추적 임무에 투입됐던 러시아 함정이 16일 흑해함대의 모항인 크림반도 세바스토폴항으로 귀항하고 있다. 세바스토폴/로이터 연합뉴스

안보에 관한 한 옛 소련의 경계 회복을 주장하는 푸틴 대통령은 나토의 추가적 동진을 힘으로 막아섰다. 2008년 나토 가입이 거론된 조지아를 침공해 본보기로 삼았다. 2014년에는 친서구 정부가 들어선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자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러시아에 두 사건은 상대가 세를 키우기 전에 선수를 치는 예방전쟁이었던 셈이다. 최근 러시아군 병력 집결도 지난달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방문했을 때 우크라이나 쪽이 나토 가입을 타진한 것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군부는 러시아가 내년 1~2월에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어게인 2014?…갈등의 핵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위치, 면적, 인구, 군사력을 볼 때 유럽 방면의 인접국들 중 가장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가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그에게 안보 차원뿐 아니라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7월 발표한 글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혈통·문화·종교·언어 면에서 불가분하며 △국명 자체가 러시아어로 ‘변경’을 뜻하며 △러시아의 한 부분일 때 가장 번창했으며 △적들이 러시아를 겨누는 무기로 활용해왔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마찬가지 이유로 서구에도 중요하다. 미국은 러시아처럼 슬라브계인 우크라이나가 친서구 국가로서 번영한다면 의미가 클 것이라고 본다. 미국은 1994년 옛 소련이 배치했던 핵탄두 1700기를 폐기하는 대가로 영국, 러시아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고도 크림반도 사태 때 돕지 못해 ‘빚’도 지고 있다. 미국은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확대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는 무력시위나 외교적 압박 말고는 러시아를 제어할 뾰족수가 없다. 크림반도 합병을 두고 가한 제재도 러시아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나토의 회원국이 아니라 파트너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군사적 충돌 때 직접 지원하기도 어렵다. 개헌으로 2036년까지 초장기 집권의 길을 터놓은 푸틴 대통령은 주변국들과 서구의 약점을 이용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에 호소하며 공세를 이어갈 공산이 크다.

미국으로선 중국 견제에 집중하는 중에 러시아의 도전이 거세진 것도 곤란한 대목이다. 2·3위 군사 강국과 갈등이 동시에 커진 것이다. 마이클 맥폴 전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는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 나토의 전략 개념을 손보려고 하나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가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에 핵심 위협으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이징과 모스크바 모두 미국의 쇠락을 선전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견제 노력을 긴밀히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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