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진보의 자리
[왜냐면]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좌파 학생단체인 전국학생행진(이하 행진)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는 건으로 꽤 시끄럽다. <조선일보>의 관련 기사가 포털의 많이 본 뉴스 1위 자리를 1주 내내 차지하더니, 연이어서 보도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각각 진영과 정파별로 해석하며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 논란은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공론장의 붕괴다. 공론장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한국의 경우 멀리로는 18세기의 두레와 장시에서 비롯되었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굳건하게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보수언론이 객관적 사실까지 조작하며 기득권의 견해를 과잉대표하는 지형인 데 더해 디지털 혁명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가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있다. 문재인 당선 이후 수구 세력들은 무조건 반대에 나서고 자유주의 세력은 궤변까지 동원하며 조국을 옹호하는 바람에 부족주의가 강화되었다. 진보 또한 조국의 잘못을 비판하면 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 결말이 정책 대결은 실종된 채 유력한 두 후보를 놓고 서로 ‘당선되면 나라를 망하게 할 나쁜 자’로 ‘확신’하고 있는 기이한 대선이다. 행진의 입장문은 공론장 붕괴의 소산이며, 그 해석도 마찬가지다. 이번 입장문을 놓고도 <조선일보>는 “윤석열 지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조를 ‘좌파도 윤석열 지지’로 프레임을 구성하였고, 진보 진영도 어린 학생의 망동으로 보거나 옹호하고 있다.
둘째, 보수 양당 정치의 구조적 모순이다. 노동자가 2천만이 넘고 그중 절반이 비정규직인데 이들을 대표하는 정당의 국회 의석은 2%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민주당이 진보로 포장되면서 진보로 가야 할 지지와 권력이 민주당으로 이전하였다. 그동안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적대적 공존을 하면서 권력과 가치를 양분하여 점유하였다. 촛불이 정권교체에만 머문 채 사회대개혁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자본-국가-보수언론-종교 권력층-사법부-보수 전문가 집단과 어용지식인’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카르텔이 조금도 균열되지 않았고 민주당도 이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조차 진보 진영이 보수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내고 3분 체계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 노동자와 서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전환될 채널도 마련되지 않고 세상을 바꿀 기회도 사라진다. 행진의 선언은 이를 각성한 목소리다.
셋째, 문재인 정권의 촛불 배반이다. 이 정권은 적폐의 핵심인 자본과 미국에는 저자세로 일관하였고 촛불의 명령인 사회개혁도 시늉만 했고, 노동을 철저히 배제하고 조국과 부동산 사태로 젊은이와 진보가 좌절을 넘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불평등은 오히려 전 정권보다 악화하였다. 국민의힘과 싱크로율도 90% 이상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진보 진영의 단체와 정당, 인사들이 ‘민주당 2중대’를 자처하였다. 윤석열을 지지한 것은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 입장문은 이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넷째, 진보의 성찰이다. 필자는 2012년에 진보대통합을 제안하고 그 회의를 주재했으며 박근혜 취임 이틀 전에 있었던 집회부터 시작하여 글이든 집회 발언이든 일관되게 퇴진을 주장하였고 문재인 정권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비판하였다. 늘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소신과 신자유주의 해체와 대안의 사회 없이는 그들이 잘 사는 세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보의 보편’이라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진보 진영에서조차 왜 늘 소수가 되어야 하는가. 그동안 진보는 신자유주의 해체와 대안의 사회를 목표로 설정하고,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략, 정책,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 채 보수와 야합하였다. 정파로 분열되어 개혁이나 혁명보다 정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민중의 생존 위기와 고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채 신자유주의적 탐욕과 이기심을 내면화하였다. 조직 내의 민주주의를 무시하였으며, 공부를 하지 않는다. 행진의 입장문도 이런 진보의 문제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지금 불평등의 극대화와 기후 위기 등 5대 위기에 처해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너무도 절박하다. 더 늦기 전에 진보가 하나로 연대하여 정의로운 전환을 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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