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日 올해의 유행어 ‘부모 뽑기’

최은경 도쿄 특파원 2021. 11.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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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 ‘2021년 신조어·유행어 대상’ 후보작이 발표됐다. 출판사 자유국민사가 1984년부터 시작한 이 상의 발표는 일본에선 연말(年末)이 왔음을 알리는 연례행사다. 후보 단어만 살펴봐도 올 한 해 일본 사회를 돌아볼 수 있어 매년 주요 뉴스로 다뤄진다. 올해 후보엔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포함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올해 후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오야가차(親ガチャ)’라는 일본식 신조어였다.

오야가차는 부모를 뜻하는 ‘오야(親)’에 뽑기 기계를 가리키는 ‘가차(ガチャ)’를 합친 말이다. 직역하면 ‘부모 뽑기’라는 뜻이다. 동전을 넣고 돌리면 상품이 든 캡슐이 무작위로 나오는 그 뽑기 기계에 부모를 비유한 것이다. 자녀가 스스로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전적으로 운에 달렸다는 이유에서다. 어린 친구들이 이 단어를 실제로 사용한 트윗을 보면 대부분 체념이나 푸념이 많다. ‘부모 뽑기 결과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부모 뽑기에서 꽝이 나와 공부도 못하고 인기도 없다’ 같은 식이다. 한국 ‘금수저·흙수저론’의 일본판인 셈이다.

오야가차라는 유행어에는 자기 운명이 날 때부터 결정된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녹아있다. 부자인 부모, 외모나 머리가 출중한 부모 밑에 태어난 소수의 대박 당첨자가 승자가 되고, 나머지의 인생은 그냥 ‘꽝’에 가깝단 것이다. 그간 일본 청년은 이른바 ‘사토리(득도) 세대’로 불리며 해외여행이나 유학, 연애, 자가용, 정치 활동 등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욕망이 거세된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이런 일본의 젊은이들도 개인의 노력이 일생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미미하다는 불평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과 비교하기보단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는 일본 사회이기에 더욱 파격적인 유행어로 다가온다.

더 놀라운 건 일본 기성세대의 반응일지 모른다. 이 단어는 지난 9~10월쯤 지상파 방송의 프로그램 등에서 연일 소개됐는데, 중·장년층 방송인이나 네티즌 다수는 “불쾌하고 철없다”고 비판했다. “부모도 대부분 자식 뽑기에 실패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대박이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진짜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면 노력하라” 등이다. 한 세대의 유행어에는 그 구성원들의 공통된 인식이 반영되기 마련인데도, 일본의 청년들이 이런 발칙한 ‘부모 뽑기’라는 단어를 쓰고, 왜 그 결과에 무기력함을 느끼는지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 반응은 별로 없었다.

자기 처지나 사회를 비관하는 청년층의 신조어는 어쩌면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넘쳐나는 듯하다. 그만큼 한국 청년층이 고민도 많고, 현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선 청년층의 유행어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문제의 본질을 짚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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