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돌격명령에 프랑스군 12만명 죽어.. 대규모 반란 터졌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1. 11.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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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4] [1차 세계대전] [下] 슈맹데담 전투

제1차 세계대전 중 1917년은 결정적인 전환의 해였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하게 되고, 대신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프랑스로서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실제로 미군이 전선에 투입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미군 도착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군 지휘부는 다르게 판단했다. 니벨(Robert G. Nivelle) 장군은 4월 16일 슈맹데담(Chemin des Dames) 지역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10㎞ 떨어져 있는 슈맹데담은 길이 30㎞에 폭 8㎞의 산등성이로, 고대부터 북유럽 방향의 전략 요충지였다.

슈맹데담, 길이 30㎞ 폭 8㎞ 능선

니벨 장군의 작전은 우선 일제 포격을 가하여 독일군의 1차 방어선을 무력화한 다음, 집중사격으로 탄막(彈幕)을 형성하면서 전군이 일시에 돌격한다는 것이었다. 니벨 장군은 그전 해의 베르됭 전투에서 유사한 작전으로 효과를 보았고, 그 덕분에 프랑스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다시 한번 같은 작전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베르됭에서 상대한 독일군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나, 이번에는 강력하게 반격해 왔다. 무엇보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항해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적을 향해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돌격하라는 명령은 어리석음과 광기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침 6시에 공격을 시작하고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벌써 이 작전이 실패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니벨 장군에게는 ‘플랜 B’가 없었다. 무모한 작전을 강행하다 보니 약 20일에 걸쳐 3㎞를 전진하는 동안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명령 불복종과 반란 사태가 폭발했다. 집합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술에 취한 채 무기 없이 나타났고, 돌격하라고 지시하면 참호로 돌아가 버렸다. 탈영한 병사만 3만명에 육박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17년 4월 29일부터 9월 5일 사이 113건의 반란이 일어났고, 연루된 군인은 4만명에서 8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는 병사 15~20명 중 한 명꼴이었다.

프랑스 니벨 장군, 페탱 장군

사실 반란은 예전부터 없지 않았다. 베르됭 전투 당시 이미 조짐이 보였다. 1916년 5월, 완전히 탈진한 2개 중대 약 200명의 군인에게 당장 최전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전날 밤 힘들게 전선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당시 전선은 최전선과 2선, 3선으로 나뉘어 있어서 병사들이 교대하는 방식이었고, 대개 최전선에서 근무하다가 후방의 3선으로 오면 며칠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들은 3선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최전선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실수가 아닌가 생각하고 지휘관들이 상부에 항의했는데도 다시 같은 명령이 돌아오자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35명이 군사재판에 넘겨져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 소문은 곧 전역으로 퍼져갔다.

슈맹데담 전투 이후에는 이런 정도가 아니라 집단적인 항거가 발생했다는 것이 문제다. 왜 이런 일들이 터져 나왔을까? 병사들이 이유 없이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평화주의자나 패배주의자가 아니다. 병사들은 지난 시절 보불전쟁(1870~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패배의 쓰라린 경험을 잘 인식하고 있고, 그만큼 프랑스의 승리를 염원했다. 다만 무능한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작전과 무책임한 지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는 사태에 진저리를 쳤다. 병사들은 슈맹데담 총공세가 승리를 향한 최후 결전이 되리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자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런 분위기가 곧 집단적인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니벨 좌천되고 페탱이 후임으로

군 지휘부는 엄격하게 대응했다. 반란에 가담한 병사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가 이뤄졌고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500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 엄청난 총살 사태가 실행되지는 않았다. 곧 분위기가 바뀌었다. 프랑스 정부는 니벨 장군을 좌천시키고 페탱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페탱은 최대한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며 미군과 그들의 전차를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처벌도 많이 완화했다. 대부분 병사에게 사면이 내려졌고, 처형된 사람은 26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전시 대규모 반란 사건의 충격은 지대했다.

다른 나라 사정은 어땠을까? 독일은 관련 문서보관소가 불타서 자세한 연구가 안 되었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동부전선의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병사들이 장교에게 총을 들이대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탈리아도 전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서 30만명이 포로가 되고 30만명이 탈주했다. 모든 참전국 병사들이 똑같이 지옥 같은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4] [1차 세계대전] [下] 슈맹데담 전투

반란 참가자들을 어떻게 역사에 기록할 것인가?

1920~1930년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을 영웅화했다. 이들이야말로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극단적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신 이들의 과장된 주장 중 일부가 전설처럼 널리 퍼졌다. 슈맹데담 전투 이후 군 지휘부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만들어 처형했다는 것이다. 10명 중 1명씩 임의로 골라서 ‘본보기 사형(fusillade pour l’exemple)’을 했다는 주장이 그중 하나다. 다만 본보기 사형은 오히려 이전에 빈발해서, 1914~1915년의 18개월 동안 약 5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에 억울하게 희생된 병사가 적지 않았다.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혹은 군 내부의 오판을 숨기기 위해 재판 없이 혹은 약식 재판으로 사형에 처한 병사들 사례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전후에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운동이 일어났고, 1935년 관련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희생자들의 가족은 고인들을 두고 배신자 혹은 겁쟁이 운운하는 비난을 들으며 엄청난 불명예 속에 살아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참전 용사는 역사에서도 잊힌 상태였다.

재판없이 처형된 병사들도

프랑스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1차 대전 참전 사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대개 탑 모양의 비석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명단 위에는 대개 ‘우리의 영웅들에게(A nos héros)’ 혹은 ‘우리의 순교자들에게(A nos martyrs)’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그런데 1차대전 당시 독일 영토였다가 그 후 다시 프랑스 영토로 바뀐 알자스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독일군으로 참전해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미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마을들의 비석에는 간략히 ‘죽은 자들에게(A nos morts)’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로 혹은 본보기로 처형당한 사람들은 이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죽어서도 차별받았던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마을에서 이런 병사들 사례를 발굴하여 수백명의 병사 이름을 새로 새겨 넣었다. 늦게나마 죽은 용사들의 영혼과 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

“반란에 가담한 군인이나 도망병도 전쟁 희생자” 1998년 기념조각물 제작

1998년 슈맹데담 전투가 벌어졌던 크란(Craonne)에서 그동안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 조각물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Ils n’ont pas choisi leur sépulture)’라는 작품의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에 참여한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는 본보기 총살 희생자 같은 이들도 프랑스 역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란 참가자나 도망병 같은 사람들을 왜 기려야 하느냐는 반대 의견 또한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쳐 조각물에 대한 심각한 훼손 사태가 벌어지더니 2014년에는 아예 작품이 도난당했다. 조각가 케른(Haïm Kern)은 다시 작품을 제작했고, 2017년 4월 16일 슈맹데담 전투 100주년 기념일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제막식을 개최했다.

슈맹데담 전투를 기념하는 박물관에 세워진 프랑스 조각가 케른의 참전용사 추모 조각 ‘그들은 자기 묘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부분). /AFP

4m 높이 청동 조각품은 거대한 그물 모양으로, 사이사이에 23개의 얼굴들이 그물코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역사의 그물 혹은 운명의 그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작품을 설치하면서 작가는 “희생자들이 역사의 그물코 속에서 일어나 땅으로부터 빛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더 가까이 오기를 염원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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