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人을 복제한 조지 시걸의 실험[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2021. 11. 23. 03:02
출근길 신호등 앞. 건장한 중년 남녀 여섯 명이 서 있다. 추운 날씨인지 이들의 옷차림은 두껍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 표정은 무겁다. 그러면서도 각자 영역에서 생활의 보람을 찾고 있는 듯 당당하다. 뉴욕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 신호등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조지 시걸(1924∼2000)의 ‘러시아워(Rush Hour·1983년)’. 인체를 그대로 석고로 뜬 다음 청동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생동감이 살아있다.
오랜만에 재개관한 리움, 이번 인간 주제의 전시장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걸작들. 조지 시걸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깡마른 채 키가 무척 큰 사람 즉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III’(1960년)을 만날 수 있다. 높이 2m가 훨씬 넘는, 그렇지만 몸무게는 가볍기 그지없는 모습. 전쟁 후 피폐한 사회의 반영인가. 정상적 육체 대신 존재로서 최소한의 상징성만 살렸다. 앤터니 곰리의 ‘표현’(2014년)은 곡선 대신 직선의 집적체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에 비해 호주의 론 뮤익은 극사실적 기법으로 거대하게 얼굴 ‘마스크 II’(2002년)를 만들었다. 잠든 사람 같지만 사실 껍데기만 남은 거대한 가면이다. 은둔형 작가의 섬세한 표현 역량, 론 뮤익은 대중적 눈길을 강하게 이끌고 있다. 리움 전시장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인간 형상들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1985년 나는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미술계를 시찰한 일이 있다. 그때 워싱턴 정부는 만나고 싶은 작가 명단을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작가 명단 가운데 하나로 조지 시걸을 썼다. 그래서 뉴저지의 작가 스튜디오를 방문할 수 있었다. 뉴욕 맨해튼 포트 오소리티 버스터미널에서 조지 시걸의 설치작품 ‘다음 발차’(1979년)를 보고 버스를 탔는데, 뉴저지 정류장에서 작가를 직접 만났다. 농부처럼 허름한 차림, 마치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작업장도 한적한 시골 양계장 건물이었다. 가업의 현장은 전시장처럼 각종 작품으로 가득했고, 한편에서는 제작 중인 작품이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그림을 그리던 조지 시걸은 의료용 붕대를 만나면서 인체 복제의 작업을 창안했다. 작가의 말대로 석고는 어떤 질감도 나타낼 수 있는 무특징의 재료였다. 석고 작업에 의한 ‘실물 뜨기’, 그것은 새로운 입체작업의 출발이었다. 작가는 주변의 평범한 친지들을 모델로 삼아 몸에 석고를 적신 거즈를 씌우고 굳으면 인체에서 떠냈다. 초기작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1961년)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조각의 대단한 실험이었다. 그리스 신상과 같은 이상미(理想美)와 거리가 멀었고, 일상 속의 평범한 모습이 새롭게 의미 부여를 받았다. 정지된 동작. 바로 연극적 효과의 영구 보존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오랜만에 재개관한 리움, 이번 인간 주제의 전시장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걸작들. 조지 시걸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깡마른 채 키가 무척 큰 사람 즉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III’(1960년)을 만날 수 있다. 높이 2m가 훨씬 넘는, 그렇지만 몸무게는 가볍기 그지없는 모습. 전쟁 후 피폐한 사회의 반영인가. 정상적 육체 대신 존재로서 최소한의 상징성만 살렸다. 앤터니 곰리의 ‘표현’(2014년)은 곡선 대신 직선의 집적체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에 비해 호주의 론 뮤익은 극사실적 기법으로 거대하게 얼굴 ‘마스크 II’(2002년)를 만들었다. 잠든 사람 같지만 사실 껍데기만 남은 거대한 가면이다. 은둔형 작가의 섬세한 표현 역량, 론 뮤익은 대중적 눈길을 강하게 이끌고 있다. 리움 전시장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인간 형상들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1985년 나는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미술계를 시찰한 일이 있다. 그때 워싱턴 정부는 만나고 싶은 작가 명단을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작가 명단 가운데 하나로 조지 시걸을 썼다. 그래서 뉴저지의 작가 스튜디오를 방문할 수 있었다. 뉴욕 맨해튼 포트 오소리티 버스터미널에서 조지 시걸의 설치작품 ‘다음 발차’(1979년)를 보고 버스를 탔는데, 뉴저지 정류장에서 작가를 직접 만났다. 농부처럼 허름한 차림, 마치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작업장도 한적한 시골 양계장 건물이었다. 가업의 현장은 전시장처럼 각종 작품으로 가득했고, 한편에서는 제작 중인 작품이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그림을 그리던 조지 시걸은 의료용 붕대를 만나면서 인체 복제의 작업을 창안했다. 작가의 말대로 석고는 어떤 질감도 나타낼 수 있는 무특징의 재료였다. 석고 작업에 의한 ‘실물 뜨기’, 그것은 새로운 입체작업의 출발이었다. 작가는 주변의 평범한 친지들을 모델로 삼아 몸에 석고를 적신 거즈를 씌우고 굳으면 인체에서 떠냈다. 초기작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1961년)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조각의 대단한 실험이었다. 그리스 신상과 같은 이상미(理想美)와 거리가 멀었고, 일상 속의 평범한 모습이 새롭게 의미 부여를 받았다. 정지된 동작. 바로 연극적 효과의 영구 보존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내가 작업하는 것은 동시대 개념들의 산물일 것이다. 내 조각 작품은 환경예술로 분류되어 왔다. 다음 세대에서는 그 동일한 개념이 설치예술로 불렸다. 그 동일한 개념은 옮겨 다닐 수 있고, 다른 이름들을 취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해프닝은 그 다음 세대에 퍼포먼스로 변형되기도 했다. 내가 작업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그 중심적인 개념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며, 만일 그 명칭이 변한다면, 그것도 괜찮다.”(예술학박사 주경란과의 인터뷰에서)
그래서 조지 시걸의 작품은 해프닝과 연관해 과정예술로 파악할 수 있고, 일종의 ‘동결된 해프닝(frozen happening)’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지 시걸의 작품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인체 조각과 거리가 있고,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하게 한다.
나는 조지 시걸과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 적지 않았다. 집안끼리도 가깝게 됐고, 내 아내는 아예 조지 시걸에게 매력을 느껴 그의 뉴저지 작업장에서 함께하면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조지 시걸이 서울에 왔을 때, 가족끼리 어울리기도 했다. 작가는 우리 집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사진도 찍었는데, 그때의 꼬마가 지금은 청년이 되었다. 가장 아쉬움에 남는 것 하나가 있다. 작가는 아시아 사람에게도 관심 갖고 싶다고 했고, 나는 기꺼이 모델이 되겠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점이다. 조지 시걸이 생각나면 뉴욕 센트럴파크 옆의 유대인미술관(The Jewish Museum)에 갔다. 거기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홀로코스트’(1982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앞에 서 있는 남자 뒤로 죽어 있는 시체들. 바로 대학살을 고발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승을 떠났고, 작품은 남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조지 시걸에 대한 내 에세이는 졸저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1991년)에 수록했다.
‘러시아워’는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의 조지 시걸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이를 오래간만에 리움 재개관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대인. 도시의 바쁜 일상 속 사람들. 뭔가 많은 생각을 던져주고 있다. 가업의 양계장을 작업장으로 바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한 조지 시걸.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마치 살아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조지 시걸의 작품은 해프닝과 연관해 과정예술로 파악할 수 있고, 일종의 ‘동결된 해프닝(frozen happening)’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지 시걸의 작품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인체 조각과 거리가 있고,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하게 한다.
나는 조지 시걸과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 적지 않았다. 집안끼리도 가깝게 됐고, 내 아내는 아예 조지 시걸에게 매력을 느껴 그의 뉴저지 작업장에서 함께하면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조지 시걸이 서울에 왔을 때, 가족끼리 어울리기도 했다. 작가는 우리 집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사진도 찍었는데, 그때의 꼬마가 지금은 청년이 되었다. 가장 아쉬움에 남는 것 하나가 있다. 작가는 아시아 사람에게도 관심 갖고 싶다고 했고, 나는 기꺼이 모델이 되겠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점이다. 조지 시걸이 생각나면 뉴욕 센트럴파크 옆의 유대인미술관(The Jewish Museum)에 갔다. 거기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홀로코스트’(1982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앞에 서 있는 남자 뒤로 죽어 있는 시체들. 바로 대학살을 고발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승을 떠났고, 작품은 남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조지 시걸에 대한 내 에세이는 졸저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1991년)에 수록했다.
‘러시아워’는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의 조지 시걸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이를 오래간만에 리움 재개관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대인. 도시의 바쁜 일상 속 사람들. 뭔가 많은 생각을 던져주고 있다. 가업의 양계장을 작업장으로 바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한 조지 시걸.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은 마치 살아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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