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선비의 충절 지킨 천년의 나무
[경향신문]
‘압각수’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는 은행나무가 있다. 충북 청주시 중앙공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은행나무(사진)다. 압각수는 잎이 오리의 발을 닮았다 해서 오리 압(鴨)과 다리 각(脚)을 써서 중국에서 불러온 은행나무의 별명 가운데 하나다. 한자 문화권의 학문을 중시하던 유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나무라는 게 특별한 명명의 시작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꿈을 키우던 때의 일이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반대파를 차례대로 제거하던 무렵이다. 그때 고려의 무신 이초(李初)는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의 계획을 막으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이색, 권근 등 반대파의 주요 인물 십여명을 감옥에 감금했다. 공양왕 2년인 1390년 5월에 벌어진 ‘이초의 옥사’가 그 사건이다.
그해 여름 청주에는 대홍수가 났다. 청주 관아는 물론이고, 살림집까지 물에 쓸려 내려갔으며 감옥도 물에 잠기고 갇혀 있던 많은 죄수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때 이색을 비롯한 선비들은 감옥 곁의 큰 나무 위에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공양왕은 기적 같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 이는 곧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라며 감옥에 갇혔던 이색을 비롯한 선비들을 풀어줬다. 이색과 함께 풀려나온 권근이 그때 은혜로운 이 나무를 ‘압각수’라 부르며 남긴 시는 지금도 나무 앞에 세운 시비(詩碑)에 남았다.
의로운 선비를 가지 위에 보듬어 안고, 큰물을 피할 만큼 큰 나무였다면, 당시에도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나무나이를 900년으로 짐작하는 근거다. 키 20m, 줄기둘레 8.6m인 ‘청주 압각수’의 수세는 그러나 별로 좋지 않다. 줄기의 상당 부분은 썩어들어 충전재로 메웠고, 부러진 굵은 가지의 흔적도 곳곳에 눈에 띈다. 9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디는 건 나무에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은 ‘청주 압각수’는 지나가는 가을의 끄트머리를 붙안고 지금 온 가지의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낼 만큼 현명함을 갖춘 ‘청주 압각수’는 더 오래 소중하게 지켜야 할 자연유산이자 문화유산이다.
고규홍 천리포수목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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