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질문을 찾는 시간
가상현실·메타버스 시대 좋지만
강의실서 얼굴과 얼굴 마주하며
문학과 자유 논하는 시간 행복
함안의 작은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했다. 인문학 강의라고 했지만, 그저 영화로 이야기를 건네는 정도이다. 그저 영화라고 했지만, 좋은 영화는 영화 이상이라 삶을 흔들어놓기도 한다. 아마도 내 강의는 답도 없고, 듣고 나면 혼란스러워지는 그런 강의일 것이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60대 여성 한 분이 다가와 말씀하신다. “강의를 듣고, 내가 이게 궁금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이 몰려와 내 MBTI(성격유형검사)를 묻는다.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 눈높이에 맞추고자 인터넷에서 해본 적은 있는데 대수롭잖게 생각해서였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생들은 몇 가지 선택지를 내놓는다. 그중 하나가 익숙하다. “맞아, 그거였다”라며 반가워하니 학생들이 까르르 웃는다. 따라 웃으니, “선생님도 재밌으시죠?” 한다. 그 눈빛에 전혀 의혹이 없어서 나조차 신기하고 신이 난다. MBTI는 재미없지만 그 얘기를 하는 학생들의 말과 표정은 너무 재밌다. 비대면수업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거울효과가 여기서 발휘된다.
어느 날은 또 삼삼오오 짝을 지은 여학생들이 다가온다. 지난 시간에 내가 입었던 회색 니트가 어떤 브랜드였는지 ‘정보 공유’를 해 달란다. 인터넷에서만 봤던 그런 식의 표현이 내게 건네진 것이 너무 반갑고 감사해서 또 잉여적 표현을 하고 말았다. “오래전에 산 옷이긴 한데,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소 오해를 할 수도 있는 브랜드인데.” 말끝을 흐리니 분위기는 어색해진다. 어디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가르치고 싶어하는 현학적 선생의 나쁜 말버릇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즐거워한다. 그리고 답을 단번에 맞힌다. “유니클로!”
나는 유니클로 불매운동에 반대하진 않았다. 지지할 수도 없었다. 그 불매운동으로 가장 아픈 피해를 본 사람은 그 매장의 아르바이트생이거나 그 매장을 운영한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유니클로, 그 거대 글로벌 기업이 몇몇 한국인의 불매운동으로 수익이 줄었으면 얼마나 줄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잠깐의 시간 동안 강의실 앞 복도에서 이데올로기를 소환했다.
우리는 또 이청준을 공부하며 함께 질문했다. 왜 이청준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지, 4·19혁명은 이청준 문학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지금 이 시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 진지해지고 또 예민해진다. 이청준이 그토록 바랐던 자유에 관해서도 생각한다. 이전 칼럼에서 나는 이번 대선에서 자유를 보장하는 대통령이 뽑혔으면 한다고 했다. 학생과의 대화에서 이 의견이 반문된다. 자유가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 그 자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얼마나 소중히 다뤄야 할 가치인지, 나는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깨닫는다.
‘개인이 자유’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자본주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 쉽다. ‘나의 자유’에 집착하는 사이, 오히려 기득권자의 전체주의로 변질되고 결국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급진적으로 질문했다. 인터넷과 블록체인이 이토록 발달한 시대에 왜 직접민주정치가 불가능한지, 그것은 기득권자인 ‘당신들’ 때문이 아닌지, 대의민주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는 등식이 정말로 성립하는지. “대의민주주의하에서는 선거날 하루만 자유롭다”는 루소의 말도, 포퓰리즘과 팬덤정치의 환경에서는 오히려 과장이 아닌지. 이청준의 소설은 모호했고 그래서 더 많은 질문을 우려냈다.
함께 강의실을 나서면서 이청준에 대한 이야기는 웃음 속에서 더 이어진다. 비대면수업이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일이다. 학생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니 더 즐겁다. 비좁아서 더 재미난다. 비대면수업은 컴퓨터 모니터처럼 평면이었다. 아무리 멀리 가도 그것은 2차원의 두 점 사이일 뿐이었다. 대면수업은 3차원이다. 수업은 ‘깊이’를 가진다. ‘여기’서 ‘저기’가 아니라, ‘여기’서 ‘어딘가’로 향한다. 그 ‘어딘가’가 늘 궁금하고 기대된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메타버스, 다 좋지만, 얼굴과 얼굴의 만남을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희망을 찾지 않는다. 지금 청년과 함께하는 이 자리가 희망이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는 자리가 곧 희망일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헤어지면서 함안도서관에서 받은 짧은 문장을 되뇐다. “내가 이게 궁금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에 뭉클했던 건, 질문을 품기도 쉽지 않은 그녀의 삶이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삶에서 얻은 이 문장을 화두처럼 간직할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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