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도 굶는다… 탈레반 장악 100일, 아사 위기의 아프간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1. 11. 2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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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FP “인구 60%가 식량 부족상태”
어린이 300만명은 급성 영양실조
수도 카불선 병원 2곳만 정상 운영
생명 위독한 영유아 치료도 못해
탈레반, 원조 바라고 유화적 제스처
정권 승인 못받아 사태 장기화 전망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친서방 정부를 축출하고 20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지 22일로 100일이 됐다. 상당수 국가가 탈레반 정권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고 있는 가운데, 경제와 사회 기반 시설의 붕괴로 아프간 국민 상당수가 극심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보도와 보고서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21일(현지 시각) WFP(세계식량계획)와 FAO(유엔식량농업기구)의 지난 8일 보고서 내용을 인용해 “아프가니스탄 3800만명 인구 중 60%에 달하는 약 2280만명이 식량 부족에 처했으며, 이 중 900만명은 기아 위험에 놓여 있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인도주의적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전했다. 10월 기준 5세 미만 어린이 300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직면해 있으며, 이 중 100만명이 즉각적인 치료가 없으면 사망할 수 있다는 유니세프 집계도 나왔다.

지난 8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한 병원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네 살 아이가 앙상한 맨다리를 드러내고 침대에 누워 있다.(위 사진) 세계 어린이날인 지난 20일 카불의 거리에서 여자 어린이들이 모여 앉아 구두를 닦다가 카메라를 보고 있다. 유니세프 집계에 따르면 10월 기준 아프간 5세 미만 어린이 300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직면해 있으며, 이 중 100만명이 즉각적인 치료가 없으면 사망할 수 있다. /AP·EPA 연합뉴스

국제적십자사·적신월사(IFRC)도 최근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IFRC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보건의료 시스템의 붕괴와 대외 원조금의 지급 차질 사태가 지속될 경우 1800만명의 아프간인이 긴급한 인도주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IFRC는 “코로나 대유행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르몽드가 전한 현지 상황은 전시나 다름없다. 카불 시내의 병원은 의료지원단체 국경없는의사회와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병원 2개를 빼고는 돈과 장비, 약품이 부족해 사실상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르몽드는 “소아과 병동에선 한 병상을 두 어린이가 나눠 쓰고 있고, 영·유아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식량 부족도 심각해 산모의 모유가 나오지 않는 지경이고, 신생아와 영아들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빠지고 있다”고 했다.

르몽드는 “탈레반 집권 이후 일자리를 잃거나 급여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손님이 사라진 자영업자들도 잇따라 점포 문을 닫으면서 사실상 경제가 붕괴하고 있다”고도 했다. 특히 탈레반 재집권 이전에 안정적 생활을 하던 공무원 상당수가 해고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이다. 전직 공무원과 교사들이 집세를 못 내고 빵과 콩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한때 교통 체증이 심했던 카불 거리에는 차가 거의 사라졌다. 이 신문은 “길거리에는 날품팔이와 구두닦이, 일감을 찾는 노동자들만 넘쳐난다”며 “가장은 집안의 가전제품과 가구를 들고 나와 식료품으로 바꾸고 있고, 학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를 그만둔 채 집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가운데, 탈레반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 여부는 진영 간 대결로 흐르는 양상이다. 아프간 탈레반 정권은 중국·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과 교류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탈레반 정권과 러시아·중국, 인접국인 파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5국이 참석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참가국들은 공동성명에서 “국제사회가 아프간 주민들을 위한 지원 노력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경제 부문 재구축의 핵심 부담은 지난 20여 년간 아프간에 병력을 주둔시킨 나라들이 분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프간 전쟁을 수행하면서 민주정권을 지탱했던 서방 국가들의 재정적 지원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에 초청받고도 불참한 미국을 비롯해 대다수의 서방 국가들은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식 승인을 미루고 있다. 탈레반 장악 직후 단행한 해외 자산 및 외화 계좌 동결 등의 조치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탈레반 장악 뒤 최근까지 4억7400만달러(약 5622억1140만원)를 지원했지만, 탈레반 정권에 대한 직접 지원이 아닌 독립적인 원조기관을 통했다.

그러나 아프간 주민들의 상황이 악화될수록 현재의 지원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데버러 라이언스 유엔 아프간 특사는 17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경제제재로 인해 아프간 내부 은행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고 이로 인해 기부금이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국제사회가 아프간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서방 국가들의 직접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탈레반 정권의 유화적 제스처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탈레반은 국제 여론을 의식,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의 교육을 허용하고 전 정권에서 일했던 이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탈레반은 최근 아프간 크리켓 국가대표팀이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 샤르자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스코틀랜드를 꺾자 트위터에 축하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는 스포츠 자체를 반이슬람적인 활동으로 엄금했던 1차 집권기(1996~2001년)와는 다른 행보로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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