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벽' 부수려 한 문익환, 윤동주·장준하의 벗

이제훈 2021. 11. 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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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16

문익환은 ‘몰래 방북’하지 않았다. 문익환은 자신의 방북 계획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만나 알렸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한테는 지인을 보내 전했다. “역사를 산다는 건,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는 문익환한테 덮어씌운 ‘잠입탈출죄’는 얼마나 옹색한가. “공산통일은 먹힘이지 통일이 아닙니다”라는 문익환한테 ‘찬양고무죄’는 또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가.

서울에서 “택시요금 2만원”이면 족하다 여긴 평양을, 문익환은 도쿄와 베이징을 돌아 닷새 만에야 도착했다. 1989년 문익환은 평양에서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두 차례 만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말,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면서, 김일성 주석 동지를 만나고자 합니다.”

1989년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고문(당시 71살)이 읽은 ‘평양 도착 성명’의 한 구절이다. 문익환은 그 자리에서, 1948년 4월19일 김구 선생이 해방 조국의 분단을 막고자 38선을 넘으며 읊은 이양연의 ‘야설’(野雪, 들판의 눈)을 노래했다. “내가 밟고 가는 눈 덮인 들판길 조심하여 헛밟지 말지어다. 오늘 걷는 나의 발자취가 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임에.”

문익환은 평양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김구, 윤동주, 장준하를 되새겼다. 이들을 꿰는 낱말은 ‘민족’. 문익환은 “김구 선생님의 뼈아픈 실패를 결코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결의로 이 자리에 왔다”고 외쳤다. 그러고는 “윤동주는 저의 죽마지우, 장준하는 나의 둘도 없는 마음의 벗”이라 밝혔다.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평양 숭실학교를 함께 다녔다. 문익환과 윤동주는 ‘조선을 밝힌다’(明東·명동)는 뜻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함께 나고 자랐다. 윤동주가 1917년 12월30일, 문익환이 1918년 6월1일 세상에 나왔다. 장준하는 1918년 8월27일 평안북도 삭주에서 났다. ‘세 친구’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자유롭고 독립된 조국’과 ‘분단되지 않은 조국’을 찾아 평생 시대를 거슬렀다. 윤동주는 해방을 여섯달 앞둔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와 ‘통일’을 외치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그러므로 1989년 평양의 문익환은, ‘김구’이자 ‘윤동주’이자 ‘장준하’다. 앞서 떠난 세 사람이 그랬듯, 문익환도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치는 것”이라던 평소의 외침대로 국가보안법을 포함해 남과 북의 그 무엇과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거나 멈춰 서지 않았다. 문익환은 ‘평양 도착 성명’ 발표 뒤 문답 없이 기자회견을 끝내려는 정준기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의 제지를 뿌리치고 외쳤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택시요금 2만원”이면 족하다 여긴 평양을, 문익환은 도쿄와 베이징을 돌아 닷새 만에야 도착했다. 문익환은 평양에서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두 차례 만났다. 3월27일 ‘주석궁’에서 김 주석과 오찬을 겸해 1차 회담을, 4월1일 모란봉초대소에서 2차 회담을 했다. 문익환-김일성의 회담 결과는, “전민련 고문 문익환”과 “조평통 위원장 허담”을 공동 주체로 한 9개항의 “공동성명”으로 4월2일 발표됐다(이하 ‘4·2공동성명’).

4·2공동성명의 3항과 4항이 특히 중요하다. “쌍방은 정치군사회담을 추진시켜 북남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와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도록 노력한다”(3항),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 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 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4항)가 그것이다.

3항은 ‘정치군사 먼저’(북)와 ‘교류협력 먼저’(남)로 평행선을 그어온 남과 북의 협상 의제 기싸움이 공통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실증이자, 남북 당국이 8차례 1년6개월에 걸친 ‘예비회담’ 끝에야 가까스로 합의한 남북고위급회담 의제를 선취한 것이다. 1990년 7월26일 남북이 합의·발표한 고위급회담 의제는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 문제”로 ‘4·2공동성명’ 3항과 큰 틀에서 같다.

“연방제 방식 통일을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4·2공동성명 4항은, 북이 ‘통일은 과정이다’라는 인식에 공개 동의한 첫 사례다. 이 합의는 남북통일 방안과 관련해 정상 차원에서 문서로 합의한 유일무이한 표현인 2000년 6·15공동선언 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의 밑돌이 됐다. ‘통일은 과정’이라는 인식에 따라 사실상 통일을 장기 과제로 미뤄둔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 당국은 통일 방안을 두고 더는 공개 설전을 벌이지 않았다.

4·2공동성명 6항에 문익환의 주도로 (중·소가 남과, 미·일이 북과 수교하는) “교차승인”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문익환이 김일성을 만나 가장 먼저 꺼낸 화두가 다름아닌 교차승인이었다. 김일성이 오랜 세월 “두 개 조선 조작·분열 책동”이라 맹비난해온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문익환이 “벽을 문으로 알고” 일부러 부딪친 것이다. 문익환 방북 2년6개월 뒤인 1991년 9월17일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분리 가입했고, 이는 지금껏 남북 공존의 국제법적 기반이다.

문익환의 방북은 “남북 교류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한다”(1989년 4월4일 베이징 기자회견)는 소신의 실천이었다. 문익환-김일성 회담은 남북 당국의 공개·비공개회담과 별개로 남쪽 시민사회와 북쪽 (준)당국 사이의 ‘제3의 남북 대화’가 가능함을 실증한 역사적 선례다.

문익환의 ‘방북 성과’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대응은 분열적이었다. 조심스러운 긍정과 전면 부정이 뒤엉켰다. 1989년 5월23일 국회 외무통일상임위에서 평화민주당 김대중 의원이 “(문익환을 만난) 김일성이 ‘노태우 대통령’이란 호칭을 써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짚자, 이홍구 통일원 장관은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생긴 것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호응했다. 이홍구는 “(4·2공동성명에 밝힌 대로) 북한이 정치·군사를 비롯한 교류협력에 대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북 고위당국자회담의 전망이 밝아질 수 있다”고 밝혔다. 문익환의 방북에 성과가 있다는 공개 평가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문익환의 방북 성과를 남북 대화와 공존의 디딤돌로 삼기보다 이른바 “공안 정국”의 빌미로 삼았다. 노태우 정부는 문익환이 평양을 떠난 1989년 4월3일, 공안합수부를 꾸려 학생·노동·사회운동 탄압에 열을 올렸다. 문익환한테는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6조)·회합통신(8조)·금품수수(5조)·기밀누설(4조)·찬양고무(7조) 등을 걸어 대법원(1990년 6월8일)이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확정판결했다.

문익환은 ‘몰래 방북’하지 않았다. 문익환은 자신의 방북 계획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만나 알렸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한테는 지인을 보내 전했다. “역사를 산다는 건,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는 문익환한테 덮어씌운 ‘잠입탈출죄’는 얼마나 옹색한가. “공산통일은 먹힘이지 통일이 아닙니다”라는 문익환한테 ‘찬양고무죄’는 또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가.

문익환은 1994년 1월18일 저녁 8시30분 숨을 멈췄다. 그날 낮 서울의 한 식당에서 문익환은 자신을 비난해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진관 스님한테 “내가 왜 프락치냐?”(김형수 <문익환 평전> 782쪽)라며 격노·한탄했다. 문익환은 ‘남·북·해외 3자 연대’체를 자임했으나 실제론 북이 주도권을 행사한 범민련 방식의 통일운동을 접고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을 꾸려 새로운 대중적 통일운동을 펼치자 제안(1993년 4월)했는데, 이게 범민련 일부 인사들의 ‘문익환은 시아이에이(CIA, 미국 중앙정보국)·안기부의 프락치’라는 근거 없는 비난의 빌미가 됐다. 75년8개월에 걸친 삶 중 11년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문익환의 강건한 정신을 허문 이가 다름 아닌 ‘통일운동 동지들’이었다는 건, 역사의 아득한 슬픔이다.

‘늦봄’ 문익환이 숨을 멈추자 그의 평생 벗·동지·반려인 ‘봄길’ 박용길이 “눈 덮인 들판”에 마저 길을 냈다. 박용길은 문익환이 제안한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의 대표를 맡았고, 옥살이를 마다치 않고 두 차례 방북했으며 2011년 9월25일 숨을 멈출 때까지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늦봄’과 ‘봄길’은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 함께 지내신다.



이제훈ㅣ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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