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코트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한겨레 2021. 11. 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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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4일 동트는 새벽녘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코트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포클레인을 모는 인력과 고용된 용역들이 아무런 통보 없이 코트의 별관 건물을 헐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코트에서 용역을 고용한 임차인 최아무개씨는 예술인들의 그라피티가 그려진 건물 외벽을 전부 파괴하였고, 더불어 운영 중이던 식당, 비어가든과 예술가들의 모임·행사 등이 이루어지는 별관의 모든 창문을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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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전후석ㅣ뉴욕 변호사·다큐멘터리 <헤로니모> 감독

11월4일 동트는 새벽녘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코트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포클레인을 모는 인력과 고용된 용역들이 아무런 통보 없이 코트의 별관 건물을 헐기 시작한 것이다. 안주영 코트 대표가 절박한 마음에 포클레인 앞으로 뛰어드는 등 온몸으로 철거에 항의하다가 결국 용역들이 쏜 물대포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2013년 11월19일 음산한 밤, 그라피티 예술가들의 성지로 불리는 롱아일랜드시티 파이브 포인츠(5 Pointz)로 낯선 이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관광 명소가 된 한 건물 외벽의 그라피티 작품들을 밤새 하얀색 페인트로 덧칠해버렸다. 그 건물과 주변 일대를 철거하고 럭셔리 콘도를 지으려는 개발업자가 용역들을 고용해 저지른 사건이었다.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를 비롯해 뉴욕의 거리예술가들과 지역 주민들, 미국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파이브 포인츠의 보존을 외쳤음에도 개발업자가 독단적으로 강행한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2014년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개발업자는 모든 빌딩을 철거하였고, 이듬해 그라피티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파괴해버린 개발업자를 ‘시각예술가권리법’에 의거해 고소하였다. 자신의 작품과 저작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예술가들의 주장은 세간의 집중을 끌었다. 결국 2017년 미국 연방법원은 ‘위상과 지명도가 있는’ 작품들은 보호가 될 권리가 있다며 예술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발자는 무려 75억원이 넘는 손해배상금을 예술가들에게 지급해야 했다.

대한민국도 베른협약 가입국으로 예술가들의 저작 인격권이 보호된다. 그런데도 코트에서 용역을 고용한 임차인 최아무개씨는 예술인들의 그라피티가 그려진 건물 외벽을 전부 파괴하였고, 더불어 운영 중이던 식당, 비어가든과 예술가들의 모임·행사 등이 이루어지는 별관의 모든 창문을 깨버렸다. 페인트로 사방에 낙서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보도 보였다. 수익성이 높은 주차장을 만들기 위함이란다. 현재 양쪽은 자신이 법적 권리가 있는 권리자라고 주장하는 만큼, 이에 대한 법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낮에 폭력과 욕설을 일삼는 용역들을 앞세워 예술가들의 공간을 위협하는 일이 대한민국 문화중심지 인사동에서 벌어진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국과 한국의 두 사건은 구체적인 사실에선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 위상과 지명도가 있는 예술작품 혹은 문화적 공간을 수호하려는 예술가들과, 자신이 소유한 건물의 수익성을 극대화하려는 건물주들의 대립 구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지난여름, 3개월 동안 코트에 입주하여 영화 편집 작업을 했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자유롭고 조화로운 코트의 매력에 빠졌다. 그 아름다웠던 공간이 주차장으로 전락할 거라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코로나19로 장기간 설 곳이 없었던 많은 예술가들, 그리고 전시와 공연, 문화적 행사에 목말랐던 시민들에게 코트라는 공간은 일종의 안식처이자 창조적 태동이 끊이지 않던 고마운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지난 주말, 코트를 사랑하는 수십명의 인파가 모여 커다란 펜스가 세워진 코트 정원에서 각자 시로, 춤으로, 음악으로, 영상으로 코트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나는 멀리 뉴욕에서 지인들이 보내준 영상을 보며 가슴앓이를 하다가, 나태주 시인의 한 글귀를 떠올렸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꽃을 보듯 너를 본다>, 2015년)

코트여, 훼손되지 말고 오래 그렇게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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