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정치의 또 다른 이름..젠더 없애는 '젠더 대선'
[경향신문]
20대 대선 정국에 수시로 젠더 문제가 소환되고 있다. 소환방식은 독특하다. 그간 구조적 불평등의 주요 축에 젠더를 포함하고 개선책을 논의하던 것에서 ‘젠더 지우기’로 논점이 옮겨졌다. 젠더적 관점의 삭제를 주장하는 ‘젠더 없는 젠더 정치’의 장이 열린 모습이다. 22일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에 대한 ‘교제살인’ 사건에 “젠더 뉴트럴(성중립적)”을 주장한 것을 두고 젠더 지우기 논쟁이 계속됐다. ‘남성 피해자’ 관점을 내세우는 2030세대 일부 남초 커뮤니티의 정치적 영향력에 쏠린 거대 양당의 시선이 이 같은 퇴행적 흐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대표는 지난 21일 데이트폭력과 스토킹으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이 결국 피습당해 숨진 사건을 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선거 때가 되니 슬슬 이런 저런 범죄를 페미니즘과 엮는 시도가 나온다”고 적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을 저격한 글이다. 이 대표는 이후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SNS 논쟁을 벌이면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고유정 살인이나 이번 살인 사건 모두 젠더뉴트럴하게 보는 게 정답인데 젠더이슈화시키는 멍청이들이 갈라치기 한다”고 했다.
게시글과 진 교수의 반박글에 단 여러 건의 댓글 등에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는 구조에 대한 지적 등은 담기지 않았다. ‘페미니즘 =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관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박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했다. 이 대표는 여성 살해 사건을 페미니즘과 연결짓는 것의 핵심 문제를 ‘스테레오타이핑(편견에 기반한 일반화)와 선동’이라면서 “유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반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선동, 전라도 비하 등등과 다를 바 없는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이라고 했다. 파키스탄인, 흑인 범죄율이 높다는 통계치를 들어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도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김병민 대변인은 같은 사건 논평에서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 대통령은 국민들께 사과하고 즉각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라”고 했다. 여성 피해자 사건을 다수 논평에 언급했지만 ‘젠더 살인’의 관점을 담진 않았다.
이는 국민의힘이 젠더 이슈에 대응하는 방식의 연장선이다. 국민의힘은 최근 적극적으로 젠더 관련 의제들에 뛰어들고 있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도 여성할당제 폐지, 여성가족부 폐지 또는 통합, 성범죄에서의 무고죄 처벌 강화 등을 다수의 대선 주자가 주장하고 나섰다. 그간 젠더 이슈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데서 방향을 틀어 논쟁을 이끌되, 사회구조에서 젠더 변수를 지우는 방식으로 ‘역방향’ 젠더 정치에 나서는 모습이다.
이 같은 대응에는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2030세대 일부 남성에 소구하려는 정치적 전략도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지난 전당대회와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 경선과정에서 국민의힘의 새로운 지지층으로 떠올랐다. 2030세대 여성 표심이 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은 데 비해 방향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이들 표심에 정치권이 러브콜을 보내는 현상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최근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역시 ‘반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남초 커뮤니티 글을 SNS에 공유하면서 구애작전에 동참하는 모습도 보였다.
거대 양당 후보와 지도부의 움직임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진중권 전 교수는 이 대표와 온라인 논쟁을 벌이면서 “공당의 대표가 그 살인의 명백한 ‘젠더적’ 성격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면서 “데이트 폭력, 데이트 살인의 바탕에는 성차별 의식이 깔려 있고 이를 인정해야 이런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이를 부인하고 은폐하면 앞으로 계속 여성들이 죽어나가는 걸 용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SNS에 “이 대표의 행위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없는 것’ 취급하는 대국민 가스라이팅이다. 젠더폭력에서 ‘젠더’를 지우면 사안을 바로 볼 수 없다”면서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안티페미 여론을 ‘청년의 목소리’로 호도하며 따라가기 바쁘다”고 적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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