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이혼까지 생각.."아빠 성 물려주기는 당연하지 않다"

박고은 2021. 11. 2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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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꾼 김지예·정민구 부부
"엄마 성 따르기, 보기에 없으니 고민할 기회 없어"
정부, 출생신고 시 성·본 협의 결정 방안 검토 중
지난 9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성·본 변경청구’ 허가 환영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지예(사진 오른쪽), 정민구씨와 엄마 성을 쓰게 된 딸.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심판한다. 사건 본인의 성을 ‘김’으로, 본을 ‘김해’로 변경할 것을 허가한다.”

단 두 줄이었다. 이 짧은 판결문 때문에 김지예(35)·정민구(42)씨 부부는 지난 몇 달 마음을 졸였다. 이들은 지난달 13일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아이의 성과 본을 아빠의 것에서 엄마의 것으로 변경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태어난 지 6달 된 부부의 딸 정원이는 이제 ‘정정원’이 아니라 ‘김정원’이다. <한겨레>는 지난 19일 서울시 성북구 길음동 거주지에서 이들 가족을 만났다.

2013년 결혼한 부부는 7년이 지난 뒤 아이를 계획하며 엄마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민법 제781조 1항 때문이었다. 혼인신고서 상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했는가?’라고 묻는 조항에 ‘예’라고 기재하지 않았기에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와 엄마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서류상 이혼을 한 다음 다시 혼인신고를 해 ‘모의 성·본 협의’ 조항에 동의하거나 일단 아빠 성을 따른 뒤 법원에 변경 청구를 내는 방법이다. 부부는 변경 청구를 먼저 시도했다. 지난 9월 초 법원에 청구서를 냈고, 한 달여 만에 서울가정법원의 ‘성·본 변경 허가’ 판결을 받았다.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어요. 판결문을 받고 나니 허무하기도 했죠. (판결문에 적힌) 이 두 줄 때문에 그간 그렇게 마음을 졸였다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 이런 성차별적 관행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김지예)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서류상 이혼 뒤 다시 혼인신고를 하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최후의 방법까지요. 법원에서 받아들여져서 홀가분합니다.”(정민구)

혼인신고서 양식

처음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하자고 제안한 건 아내 김씨였다. 결혼 전 우연히 한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본 게 계기였다. 방금 출산한 여성 연예인은 얼굴이 퉁퉁 부어 누워있는데 시부모가 아기를 보면서 ‘우리 ○(아빠 성)가를 이을 후손이 태어났다’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왔다. 김씨는 “당시 출산에 대한 생각도 없었는데 모욕감이 들었다”면서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우리 ○씨 집안사람’ 운운하는 모습이 마치 영역 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고생해서 출산한 여성은 아기를 낳자마자 배제됐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를 낳으면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남편 정씨도 아내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아빠 성’을 기본값으로 하는 관행과 제도가 잘못됐다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도 막상 실천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당초 아내와 ‘모의 성·본 협의’ 조항에 ‘예’라고 하기로 약속하고 혼자 혼인신고를 하러 간 정씨. “아빠 성 쓰실 거죠?” 당연하다는 듯 묻는 직원의 질문에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정말 엄마 성을 따르도록 해도 될까?’ 한순간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마음 깊은 곳에 뭔가를 빼앗긴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은 다 아빠 성을 주는데 나는 왜 빼앗겨야 하지?’라는 생각이요. 사실 빼앗긴다는 표현이 떠오른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뜻이죠.”(정민구)

“엄마 성 따르기는 아예 보기에 없으니까 고민할 기회조차 없죠. 법과 제도가 고정값으로 아빠 성을 따르도록 해놨으니까…. 만약 제도가 유연했다면 남편도 거부감을 훨씬 덜 느끼지 않았을까요?”(김지예)

정씨가 엄마 성을 따라야겠다고 확신한 건 아내의 임신·출산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다. 아이를 열 달 가까이 품고, 목숨 걸고 출산을 하고, 젖 물리느라 밤낮없이 고생하는 아내를 보면서 아빠 성을 물려주는 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확신이 서자 주변 사람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양가 부모님은 처음엔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지인들도 우려의 시선보다는 지지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에서는 엄마 성을 쓰는 게 낯설다. 편견 섞인 시선도 받는다. 정씨는 “나중에 아이가 스스로 ‘왜 나만 엄마 성을 따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성을 따르는 게 아이가 평등한 가치관을 가지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부성 우선주의 폐지는 고정값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성평등을 이유로 성·본 변경을 청구한 우리 부부 같은 사례는 거의 없는 거로 안다”면서 “주변 사람들도 ‘엄마 성 따르는 게 가능해?’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법·제도가 아빠 성을 고정값으로 해놓고, 엄마 성을 고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정씨도 “부성 우선주의 폐지는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이고, 평등이냐 차별이냐의 문제”라면서 “당연히 폐지 수순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4월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 자녀의 성 결정 방식을 자녀의 출생신고 시 부모 협의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자기만의 정원을 꾸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딸 정원이. 김씨·정씨 부부는 정원이가 성평등한 이름을 물려받은 만큼 평등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네가 엄마 성 쓰는 걸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차별해 온 부성 우선주의 원칙에 우리는 당당히 맞선 거야. 앞으로도 편견과 차별에는 당당히 맞서는 정원이가 됐으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대신 좋은 대학 가라, 돈 많이 버는 일 해라, 결혼해라 같은 잔소리는 하지 않을게. 너의 삶을 살아. 정원아, 우리 재미나게 살아보자.”(성·본 변경 확정원을 받은 9일 기자회견서 읽은 정민구씨의 편지 중)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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