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ㅣ 연상호의 귀신 같은 배우사용법

아이즈 ize 김수정(칼럼니스트) 2021. 11. 2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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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김수정(칼럼니스트)

'지옥' 김신록, 사진제공=넷플릭스

연출자, 각본가이기에 앞서 만화가라는 뿌리 덕분일지 연상호 감독은 배우들의 새로운 얼굴을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듯하다. 넷플릭스 6부작 오리지널 '지옥'을 보며 감탄한 여러 지점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연상호의 배우 활용법이었다.

'지옥' 속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예고 없이 사람들 앞에 천사가 나타나 지옥행 시간을 고지하고, 그 시간이 되면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다. '지옥'은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과 사회적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지옥행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이들이 얽히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연상호 감독이 쓰고 그린 동명의 웹툰과 그의 초기작 '지옥-두개의 삶'을 원작으로 한다.

지극히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마치 바로 이곳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리얼함을 느끼게 만든 건 이를 표현하고 전달한 배우들의 공이 컸다. 전작들에서 보여주지 않은 지극히 새로운 표정, 가장 잘하는 연기에 한 끗을 달리한 디테일, 결코 잊히지 않는 충격적인 연기에 이르기까지. '지옥'의 배우들은 저마다 인생 연기를 펼쳐 보이며 시청자들을 '지옥'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지옥' 박정민(왼쪽)과 원진아. 사진제공=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의 목소리 연기로 이미 여러 차례 연상호 감독과 호흡을 맞춰온 양익준은 적절한 무게감의 분노와 슬픔, 특유의 친근함으로 드라마의 시작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킨다. 원진아의 짙고 깊은 연기는 얼핏 고구마 캐릭터로 여겨질 수 있는 인물의 행동에 공감을 불어넣는다. 그가 연기한 송소현은 긴장과 갈등의 진폭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으나, 배우의 연기가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그저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기 쉬웠을 것. 

박정민은 극본의 행간을 채우며 그가 얼마나 탁월한 배우인지를 또 한 번 증명한다. 박정민이 연기한 배영재 PD는 조금은 튀는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이면서 시청자가 몰입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을 박정민은 여유 넘치게 소화해낸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옥'에서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건 박정민의 초중반 분량이다. 특유의 밉지 않은 짜증 연기를 가장 적절한 순간에 툭 던지듯 선보이며 작품의 호감도를 한껏 높인다. 아마도 연상호 감독이 그에게 기대했던 바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작품 전체의 맥을 짚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확한 연기를 선보이는 건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다. 

'지옥' 유아인, 사진제공=넷플릭스

유아인과 김현주는 '지옥'을 통해 연기 인생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새진리회의 의장 정진수를 연기한 유아인은 기괴하면서도 신비롭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연기로 '지옥'의 세계관을 탄탄히 만들어낸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보다 더 쉽게 표현할 다른 방식이 있었겠지만 유아인은 어깨에 힘을 뺀 새로운 연기를 택했다. 종종 섬뜩하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아슬아슬하지만, 절대 넘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안으로 뜨겁게 끓어오른다. 김현주는 '발견'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배우이지만, '지옥'을 통해 또 한 번 발견되었다. 새진리회와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화살촉 집단에 맞서는 변호사 민혜진을 연기한 그는 섬세한 연기와 날카로운 액션 연기를 두루 선보이며 놀라움을 안긴다. 그의 지난 24년 필모그래피에서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연출자가 배우에게 또 다른 얼굴을 끄집어내는 부지런함과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옥' 김현주, 사진제공=넷플릭스

돌이켜 보면 연상호 작품 속 배우들은 각자 잘하는 것을 비틀거나, 해보지 않았던 연기들을 선보이며 연상호 월드에 흠뻑 녹아들었다. '부산행'에서 아빠 연기를 선보인 공유, 맨주먹으로 좀비를 때려 부수는 애처가 마동석, '염력'의 악역 정유미, '반도'의 처절한 생존자 강동원에 이르기까지. 어디 사람(?)뿐인가. 좀비와 괴물도 그가 만들면 다르다. 지극히 현실적 토양 위에 펼쳐진 장르적 소재이지만 이질감 없이 '연상호 월드'를 만들어낸다. 질주하는 '부산행'의 K-좀비에 이어 '지옥'의 거대한 괴수 크리처는 그 자체로 작품에 진한 인상을 남긴다.

'지옥', 사진제공=넷플릭스

새로운 얼굴의 발견도 빼놓을 수 없는 연상호의 재주 중 하나다. 충격적인 장면을 탄생시킨 김신록은 '지옥'의 값진 수확 중 하나다. 이처럼 안정적인 배우, 익숙한 조합을 벗어나 새로운 얼굴과 표정들을 찾아내는 것은 한국 콘텐츠를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연상호의 작품이 늘 새로운 이유, '지옥' 속 만화적 상상력이 지극히 현실로 느껴졌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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