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지키다 독립운동 뛰어든..'김가진의 生' 다시보기

오남석 기자 2021. 11. 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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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망국에서 초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대, 최일선 현장에서 활약한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은 논란의 인물로 남았다.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새 책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에서, 내년 7월 4일로 100주기를 맞는 김가진에게 여전히 드리워진 부정적 평가에 반기를 든다.

망명길에 함께 올랐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물론 대동단원 83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지만, 김가진에 대한 서훈은 7차례나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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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단 총재 김가진’ 발간

일제 남작 작위…친일파 논란

조선 망국에서 초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대, 최일선 현장에서 활약한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은 논란의 인물로 남았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중국 망명까지 감행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몸담았는데도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새 책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에서, 내년 7월 4일로 100주기를 맞는 김가진에게 여전히 드리워진 부정적 평가에 반기를 든다. 저자에 따르면 김가진은 을사늑약에 반대했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가 보다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벌어진 3·1운동이다. 73세의 고령에도 그해 4월 조선민족대동단을 창설해 국내에서의 비밀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10월에는 상하이(上海)로 옮겨가 임정 고문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김가진이 충남관찰사 시절 의병운동을 탄압하고 경술국치 당시 일제의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사후에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망명길에 함께 올랐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물론 대동단원 83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지만, 김가진에 대한 서훈은 7차례나 거부됐다. 저자는 서훈 거부가 “기능주의적인 단순한 관점”에 입각해 이뤄졌다면서 “지금이 아닌 그때의 시점에서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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