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자 과실'로 치부한 사고, '미숙련자 투입'한 회사 책임 쏙 뺐다

신다은 2021. 11.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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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예고된 산재, 현대중공업의 교훈]
'하'-산재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중대재해 기업은 사고의 원인을 묻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오후 5시께 퇴근해야 했다. 2020년 4월16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김아무개(45)씨는 잠수함 어뢰가 들어 있는 공간(발사관)과 이를 닫는 문 사이의 공간을 자로 측정해 적정 간격이 되도록 조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6시였지만 다음날 잠수함 발주처의 검사가 예정돼 있어 그날 작업을 끝내야 했다. 발사관을 닫는 문은 두개였고 안쪽 문과 바깥 문이 1.6m 간격을 두고 있었다. 두 문이 서로 연동돼 있어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문도 함께 닫혔다.

오후 6시10분께 김씨가 마지막 작업을 마치자 밖에서 대기하던 신호수가 조종관으로 ‘닫아도 된다’고 무전을 했다. 안쪽 문이 넓은 궤도를 그리면서 닫히자 김씨는 물러서서 맞은편 바깥 문과 잠수함 벽 사이 좁은 공간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안쪽 문과 연동된 바깥 문이 함께 닫히면서 김씨의 머리가 좁은 공간에 그대로 끼였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데 걸린 시간은 15초. ‘악’ 하는 고함 소리에 신호수가 급히 문 개방을 지시했지만 김씨는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숙련자들 “그 일정 맞추긴 불가능”…회사는 작업 강행

이 사고의 원인은 무엇일까. 산업재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조사 연구팀’이 ‘현대중공업 중대 재해 사고백서 Ⅰ’에서 검토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재해조사의견서를 보면 몇가지 단서가 나온다.

우선 문을 닫으라고 무전한 신호수가 발사관 정비 작업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해당 공정에 숙련된 작업자들은 ‘검사 일정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니 미뤄달라’고 요구한 뒤 먼저 퇴근했으나 회사가 작업을 강행하기로 해 공정 작업 경험이 없는 신호수를 대체 인력으로 투입했다. 재해를 당한 김씨 역시 해당 공정의 작업 경험이 한번뿐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사전에 문 끼임 위험을 안내받지도 못했다. 공정의 작업 위험요인을 미리 평가해 노동자들에게 공유하는 ‘표준작업지도서’가 문 끼임 위험이 아닌 ‘장비 분해 조립 시 손가락 주의’라는, 작업 공정과는 무관한 사항을 엉터리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쪽 문을 정비할 때 바깥 문과 연동을 해제하는 조처를 하지 않았다. 왜 이런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당시 사고 현장을 방문했던 김경택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대의원은 2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일반적으론 검사를 할 때 문 연동을 해제한 뒤에 작업하는데 그날은 일이 바빠서 빨리 작업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작업자의 ‘불안전한 행동’만 부각…회사 책임·원인 빠진 결론

2020년 4월16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김아무개씨가 사고를 당한 잠수함 어뢰 발사관 현장 모습. 재해조사의견서 갈무리

“항상 표준 작업을 유도하고 있으나 불안전한 행동을 하는 작업자가 많다.” 한영석 현대중공업 사장이 지난 2월 산재 청문회에 참석해 밝힌 의견이다. 산재의 대부분이 노동자의 불안전한 행동에서 기인한다는 미국의 산업안전공학자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의 ‘도미노 이론’을 차용했지만, 그러한 행동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제거하자는 하인리히의 취지에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청문회에서도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고 산재 발생 원인을 노동자 과실로 돌린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실 노동자의 ‘불안전한 행동’ 개념은 기업들 사이에서 편의적으로 해석돼 왔다. 하인리히의 이론을 발전시킨 안전보건학자 프랭크 버드도 불안전한 행동을 야기하는 설비, 환경 등 행동 너머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즉 단순히 노동자의 불안전한 행동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노동자의 그런 행동을 야기했고 작업 환경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산업재해 이론의 흐름이 사고의 인적 속성을 강조하던 데서 시스템의 불완전함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스위스 치즈 이론’ 등 시스템에 뚫린 구멍을 찾으려는 접근이 대중화됐다. 그러나 기업들은 여전히 노동자의 불안전한 행동만을 문제 삼고 정작 그것을 야기한 배경은 파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발방지책도 ‘사고 부른 작업환경 개선’은 없어

다시 김씨 사고로 돌아가보자. 당시 현대중공업 안전경영실은 자체 보고서에 사고 원인을 ‘휴먼 에러’라고 적었다. “동료 작업자가 문 앞 재해자의 발 위치만 확인한 채로 ‘문 닫음’ 요청을 함으로써 재해자가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재발방지책으론 “내부 문을 열어 신호수가 작업자 안전 위치를 확인할 것”을 주문했다. 신호수가 작업자 위치를 잘 볼 수 있도록 내부 문을 개방하라는 뜻이다.

현대중공업은 또 “외부문(안쪽 문)과 외판문(바깥 문)의 연동 해제”와 “표준작업지도서 제정”도 재발방지책으로 제시했다. 사고 당시 두 문이 동시에 연동돼 사고가 발생했으니 앞으로는 이를 해제하도록 하고, 지도서에 작업 공정이 반영되지 않았으니 이를 반영하겠단 취지다. 애초에 왜 두 문의 연동 장치가 해제되지 않았고 지도서가 형식적으로 적혔는지에 관한 분석은 없었다. 무엇보다 동료 작업자가 왜 신호를 잘못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사기한에 쫓겨 미숙련자인 그를 교육도 없이 투입한 것과는 관련이 없는지 검토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이 김씨 사고에 한해서만 유독 무지했던 것일까. 중대재해가 발생한 이후 현대중공업이 작성한 안전작업계획서 자료를 살펴보면 회사는 사고의 다양한 원인을 찾는 것에 줄곧 소극적이었다.

지난 2019년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가 크레인 없이 선박 시험용 경판(원통형 몸체의 양 끝단에 붙이는, 강판으로 만든 곡면판)을 자르던 중 경판에 깔려 숨진 사고의 경우, ‘크레인 대여 절차가 복잡하고 시일이 걸린다’는 지적이 2년 전부터 있었고 작업 당시 표준작업지도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도출한 사고 원인은 ‘표준작업절차 미준수’와 ‘작업지도서에 구체적 안전조치 미흡’이었다. 왜 크레인과 작업지도서 없이 일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게다가 현대중공업이 재해자의 동료 작업자에게서 받은 진술서 말미엔 ‘허위로 판명 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으며 민형사상 책임을 지겠다’는 경고 문구가 삽입돼 있다. 사업주가 중대재해 발생 시 참고자료로 작성하는 서면일 뿐인데도 사실상 작업자에게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재발방지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려면 사고를 촉발한 다양한 원인부터 수면 위로 드러나야 한다. 백서를 작성한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조사 연구팀이 “사고의 상황과 원인을 상세히 기록해 잠재된 위험을 드러내려” 한 것도 그런 이유다. 내년 1월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도 사업주의 재해 예방 의무를 포괄적으로 규정해, 사업주가 중대재해에 따른 책임을 피하려면 스스로 사업장의 위험 요인을 찾아내고 대처하도록 유도한다.

2021년 2월 울산 현대중공업 현장에서 받침대에 올려둔 철판이 미끄러져 ‘끼임’ 사망사고가 발생한 현장 모습.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제공

“산재, 인적·구조적 요인” 총체적 복원이 재발방지 출발점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겨레>에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고 인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이 혼재돼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어 “산재 원인에 대한 여러 견해가 다툼을 벌이면서 노사가 서로 간과하는 내용을 드러내는 건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가능하면 노사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등 대화 창구를 통해 접점을 찾아나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부산지방고용노동청 울산지청은 오는 29일 현대중공업의 종합안전대책 이행사항에 관한 점검 회의를 개최한다. 현대중공업 노사와 노동청, 안전공단 관계자들이 모여 지난 6월 현대중공업이 마련한 산재 예방 대책이 현장에서 얼마나 이행되는지 파악하고 개선 방향을 공유할 방침이다. <끝>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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