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희 연구원 "부고장 쓰는 심정으로 '산재사고 서사' 복원"

신다은 2021. 11.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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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백서Ⅰ' 펴내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사회적 용어가 됐고 ‘직영화를 하라’거나 ‘원·하청 위험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라’는 주장도 나오지만, 정작 외주화가 공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은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백서 Ⅰ’ 발간 작업에 뛰어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외주화한다는 건 원청의 안전 관리에서 빠져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지시와 소통에서도 배제된다는 건데 과연 원청의 위험성 평가가 각 공정대로 세분화돼 있는가, 그것이 하청에 하청을 거쳐도 계속 적용되는가, 원청의 반장 라인이 하청에 안전 지시를 하는가 등 분절된 구조 속에서 위험이 작용하는 과정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주희 연구원이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이하 노조) 쪽에 먼저 연구를 제안했다. 그리고 노조의 발주로 2014년 이후 현대중공업 산재 사고 35건을 질적으로 분석한 백서를 펴낸 ‘현대중공업 중대재해 사고조사 연구팀’의 연구 책임자도 맡았다.

“연구 기간이 3개월이었는데 이 가운데 2개월을 자료 모으는 데만 보냈어요. 재해조사의견서는 국회의원 4명을 통해도 27개밖에 못 받았고요. 판결문도 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가 확보해둔 걸 부탁해 받았어요. 그간 노조가 확보한 각종 자료들을 피디에프(PDF) 파일로 전환하고 사고 당시 사진자료까지 모으니 30기가가 넘더라고요.”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통해 원·하청 구조가 촉발하는 위험의 면면이 개별 사고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자료집을 구성했다.

외주화로 분절된 원·하청 구조…현장에 위험의 면면 드러나길

분석한 내용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했다. 전 연구원은 “아무리 작업지도서나 툴박스미팅(안전사항을 공유하는 아침 회의)으로 공정의 위험을 전달해도 실제 작업 현장에선 기계와 노동자가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각각의 사고를 서사로 충분히 풀어내지 않으면 위험을 두텁게 인식하기 어렵다”며 “사고를 단순히 유형으로 분류하지 않고 ‘때늦은 부고장’을 쓴다는 심정으로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고 말했다.

회사도 노동자들 탓만 말고, 스스로 위험 인식하게 지원을

노동자들은 직접 사고를 당하거나 동료의 사고를 목격하는 등 산재 위험에 늘 노출돼 있지만 정작 자신이 속한 사업장에서 발생한 각종 사고의 전말은 전해 듣지 못한다. 전 연구원은 “2018년 김용균 특조위(‘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조사 시절 작업자들을 만났는데 ‘재해자가 잘못했다더라’는 소문만 듣고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는 걸 보고 노동자들에게 사고 내용을 공유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물론 연구에 아쉬움도 있었다. 연구팀은 ‘위험을 드러내는 데 서사만한 게 없다’고 판단했지만, 원했던 서사를 생각만큼 생생하게 복원하기 어려웠다. 자료에 담긴 정보만으론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한 작업자가 수동으로 여는 빅도어를 자동으로 제어하다가 문에 끼여 사망한 사건이 그런 경우였다. 이 사건은 작업자가 임의로 누름대를 만들어 빅도어를 열었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됐다. 전 연구원은 “검찰이 작업자의 누름대 이용 사실에만 집중했는데 사실 그 사건은 야간에 작업자 혼자 일했던 공정이다. 누름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사정이 있었는지, 현장 안전관리자가 이를 묵인했는지 다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의 실체를 다루는 노동조합과 회사의 접근 방식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전 연구원은 “오히려 정부와 사측, 노조 이렇게 세 주체의 보고서를 동시에 살펴보니 그나마 구조적인 원인이 뭔지를 짤막하게라도 언급하고 지적한 것은 노동조합이었다”며 “사측은 재발 방지 대책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원인을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루는 과정은 거치지 않더라”고 말했다.

전 연구원은 노동조합이 만드는 제2, 제3의 백서가 계속 나오기를 바란다. 이번 백서의 이름을 ‘사고 백서 Ⅰ’로 지은 것도 그런 이유다. “회사나 공단이 사고조사보고서를 아무리 잘 작성해도 조사 관점이나 방향이 노동조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양질의 보고서가 노조 이름으로 나오면 회사와 정부에 좋은 긴장을 줄 수도 있고요. 회사도 현장 노동자들의 ‘불안전한 행동’을 탓할 거면 스스로 조사하고 기록해서 위험을 인식하도록 지원해 줘야 합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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