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소설(小雪) 즈음
[경향신문]
바람이 잠자리 날개 위에서 잠시 쉬어갈 때에도
제 몸을 키우며 목청을 가다듬던
계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온기 없는 이불을 잡아당기며 눈뜨는 어느 날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기도 한 풍경이
눈발 앞에서 어리둥절한데
심술 난 생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수백 번쯤 찔려
세상에 거꾸로 서 있는 듯 절뚝거려도 가끔,
환한 눈물의 어디쯤 닿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면 됐다고
애달픈 얼굴들
서로의 심장을 뜨겁게 포개는 중일까
무뎌지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 일조차
아름다운 고행이어서
몸보다 먼저 눈발을 껴안은 마음이
손가락 끝에 닿을 것 같은 허공 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김밝은(1964~)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 있다. 아득히 먼일인지라 누구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약속한 사실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으로부터 멀리 흘러왔지만, ‘첫눈의 약속’은 아직도 내 가슴 한쪽에 잔불처럼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 호호 불어주면 다시 살아난 불씨가 활활 타오를 것만 같다. 첫눈은 마음을 달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낭만적이다. 은행나무 아래를 서성이면 단풍잎 닮은 첫사랑이라도 만날 것 같은.
입동이 겨울의 시작이라면 소설은 추위의 시작이다. 작은 봄처럼 날이 따스해 소춘(小春)이라 하는데, 이 시의 화자는 실연이라도 당한 듯 고통스러워한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아침에 홀로 눈을 뜬다. 날카로운 생의 모서리에 서 있듯 위태롭기만 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애달픈 얼굴들”과 함께 지낸 날들을 추억하는 것조차 괴로워한다. “눈발을 껴안은 마음”을 녹여줄 난로 같은 사람이라도 만났으면….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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