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거는 한겨레] 익숙한 풍경과 결별하기

정환봉 2021. 11. 2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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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거는 한겨레]

정환봉ㅣ소통데스크 겸 불평등데스크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네, 맞습니다. 수많은 글에서 수없이 인용됐을 웹툰 <송곳>의 명대사입니다.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입장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라는 진실을 이보다 더 탁월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을 다룬 원작에서 이 대사는 서글프게 읽힙니다. 오랫동안 노동자의 편이었다 어느새 반대편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노무사 구고신은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며 교육을 듣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올바른 곳에 선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겠죠.

쉽지 않을 일을 해내기 위해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송곳> 대사에 빗대 보자면, 풍경을 열심히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풍경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스스로 선 곳을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많은 기사를 유통하는 언론사에는 포털 댓글 창이 그 익숙한 풍경 중 하나였습니다. 댓글 창은 공론장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성범죄 기사 등의 경우 2차 피해를 주는 댓글이 유독 많이 달립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너무 익숙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네이버는 지난 8월 각 언론사가 개별 기사의 댓글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경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한겨레>는 내부 논의를 거쳐 성범죄 사건이나 피해자가 부득이 등장하는 보도 등 2차 피해가 예상되는 기사에 한해 포털 댓글 창을 닫는 기능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익숙한 풍경과의 결별입니다.

<한겨레>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곳에서 다른 풍경을 보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가장 큰 구실을 한 것은 젠더팀입니다. 젠더팀은 <한겨레> 창간 33돌을 맞이한 올해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성평등한 사회에 기여할 콘텐츠를 만들고 성폭력 보도에서 2차 피해를 예방하자는 다짐을 담은 기준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취재원이나 사진·영상·일러스트 등에 특정 성만 포함하지 않고, 성별과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을 쓰지 않으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이 담겼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런 노력이 성평등 저널리즘 가치 확산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며 <한겨레> 젠더팀을 올해 민주언론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기후위기 보도의 새로운 풍경을 열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기후변화팀은 지난달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2주 동안 취재했습니다. 한국 언론 중 가장 오랜 기간 현장을 지키며 연재 보도한 ‘COP26 글래스고 통신’만 30건이 훌쩍 넘습니다. 2년 전인 2019년 12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2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때와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보도량도 많았고, 생생함도 살아 있었습니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글래스고를 찾은 노동자, 자신의 미래를 지키려 총회를 찾은 청년, 실망스러운 총회 결과를 비판하는 기후단체 활동가, ‘지금 당장 기후정의’를 외치며 시위에 나선 영국 주민의 목소리가 기후변화팀 기자들을 거쳐 고스란히 한국에 전달됐습니다. 지난해 4월 꾸려진 기후변화팀의 꾸준한 노력이 만들어낸 <한겨레> 보도의 변화였습니다.

여전히 <한겨레>에 걸맞은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서글픔을 주는 곳이 아닌 희망을 걸어봐도 좋겠다고 여길 만한 자리에 서 있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더불어 <한겨레>가 지켜야 할 가치는 지키면서도 주어진 풍경에 익숙해지지 않고 더 나은 풍경을 만들기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독자들의 ‘벗’으로 남겠습니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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