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덕거릴 일이 아니다

김진철 2021. 11. 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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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자에게 매서운 지적을 받았다.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다." 대통령 시절 이명박의 방명록 글이다.

학창 시절 주입식 암기형 수동적 공부의 휘발성도 문해력 추락의 원인일 것이다.

시시덕거리기만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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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 프리즘] 김진철ㅣ책지성팀장

한 독자에게 매서운 지적을 받았다. 책면에 매주 쓰는 짧은 칼럼 ‘책거리’에 ‘희희덕거리다’는 표현을 썼는데 북한말이었다. 표준어는 ‘시시덕거리다’, ‘실없이 웃으면서 조금 큰 소리로 계속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시시덕과 희희덕 또는 히히덕의 뉘앙스는 묘하게 다른 듯 느껴진다. 부끄러웠고 많이 배웠다.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다.” 대통령 시절 이명박의 방명록 글이다. “후세에 기리 남으리라”고 반기문도 오자를 남겼다. 안철수는 “대한민국을 굳건이 지켜내겠습니다” “아름다운 사회를 꿈꿈니다”라고 적었다. “오월 정신을 반듯이 세우겠다”고, 지평 대신 지평선을 열고 통찰 대신 성찰을 배우겠다고, 대선 후보 윤석열만 잘못 쓴 건 아니다.

한글, 맞춤법, 어렵다. 띄어쓰기는 더 어렵다. 글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들도 완벽히 알지 못한다. 문장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문해력은, ‘4흘’이나 ‘무운’처럼 바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지 않지만, 띄어쓰기보다 더 어렵고 맞춤법보다 더 중요하다. 문맹률이 세계 최저인 한국에 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문해력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문해력은 세대 간 격차가 세계 최고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2012년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한국의 문해력은 273점으로 평균(266점)보다 높았다. 들여다보면 16~24살은 4위로 세계적 수준이지만 35~44살은 평균보다 낮고 45~54살은 하위권, 55~65살은 최하위권으로 추락한다.

학생들은 입시와 취업 공부하느라 문해력 수준이 높게 나왔을 것이다. 헤겔 미학이 수능에 등장할 정도니 경쟁에서 이기려면 열심히 갈고닦아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다. 이후 문해력은 급전직하로 떨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바닥을 보인다. 안 읽고 안 쓰고 생각하지 않으면 희미해지고 헷갈리게 된다. 과거 맞춤법인 ‘읍니다’에 머물고, 길이와 기리, 굳건히와 굳건이, 반드시와 반듯이가 혼동된다. 학창 시절 주입식 암기형 수동적 공부의 휘발성도 문해력 추락의 원인일 것이다. 오지선다형 답을 찾는 공부의 한계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 청소년과 청년의 문해력은 떨어지는 추세다.

2017년 탄핵 직후 열린 대선에서 촛불 시민의 흥분도는 하늘을 찔렀다. ‘한걸레’라는 표현이 급증했다. 특히 대학에 몸담은 언론학자가 한걸레라고 비난하는데 당혹스러웠다.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험한 별명으로 부르는 것과 한걸레라는 폄훼가 뭐가 다르냐고 소셜미디어에 적었다가 ‘좌표 찍히고’ 구석에 몰렸다. 유력 정치인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철벽에 부딪힐 뿐이었다. 분노한 대중에게 ‘문해’를 호소할 길은 없었다.

문해력은 소통의 기반이다. 말과 글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지점에서 갈등은 증폭된다. 모든 시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며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갈등 해소의 과정은 능동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문해력에 기반하지 않은 갈등은 소모적이다. 편견과 음모론이 문해력을 갉아먹고 서로 다른 이야기로 침 튀기면 언성만 높아질 뿐이다. 더구나 이 사회를 이끌어가겠다는 이들의 문해력이 바닥이라면, 배웠다는 이들의 언행이 소모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대중 선동을 일삼는다면….

문해력은 학력이나 지식 수준보다 삶의 자세나 가치관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페미니즘을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어 성별 갈라치기에 매달릴 때, 노동과 인권에 대한 천박한 관념에 머물 때, 문해력이 작동할 여지는 없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사법시험·고등고시를 통과하거나 기업가로 성공한 정치인들, 최소한 대한민국 평균 이상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징후적이다. 시시덕거리기만 할 일이 아니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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