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망치로 때려도 '초범+합의=집유'..풀려난 남편은 아내를 죽였다

최윤아 2021. 11. 2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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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36% '전과' 안 남는 가정보호사건 송치
가정폭력 별도 양형기준 없어 폭행죄 기준 적용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피고인이 위험한 물건으로 부인인 피해자에게 상해를 가하고, 협박을 하는 등 이 사건 범행의 죄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 다만, 피고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있고 초범인 점,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등을 참작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

지난 9월28일 제주지법은 ㄱ씨에게 이같은 선고를 내렸다. 판결문을 보면 ㄱ씨는 지난해 12월2일 아내인 ㄴ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유리로 된 화분을 아내 머리 쪽으로 던지고, 쇠망치로 ㄴ씨의 핸드폰을 부수고, ㄴ씨의 팔과 다리를 수차례 내려쳤다. 또 양손에 든 흉기로 ㄴ씨 목을 겨누며 협박하기도 했다. 이날부터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해 12월27일에도 ㄱ씨는 피해자의 얼굴을 때리려다 이마에 열상을 입혔다.

둔기와 흉기를 동원한 폭행이 반복해 발생했는데도 제주지법은 ㄱ씨가 ①초범이고 ②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리고 38일 뒤인 이달 4일 ㄱ씨는 아내를 흉기로 살해했다. ㄱ씨는 가정폭력으로 최근 3년간 6차례나 경찰에 신고돼 경찰도 그를 ‘재범 고위험군’으로 판단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도 ‘초범’이라는 이유로 풀어줘 살인을 막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재판부의 이례적인 ‘양형 실패’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행 양형기준을 따르다보면 가정폭력 가해자의 상당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는 조건에 놓인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법관이 형을 정할 때 참고하도록 ‘양형기준’을 정하고 있다. 가정폭력을 저지른 피고인에게 적용하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재판으로 넘겨지는 형사사건 가운데 약 92%에 달하는 범죄군에 양형기준이 설정되어 있으나, 가정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 사례처럼 피해자를 폭행한 가정폭력의 피고인은 일반 ‘폭행죄 양형기준’을 적용받는다. 바로 여기에 집행유예 주요 긍정참작사유로 △초범(형사처벌 전력 없음) △처벌불원(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 포함)이 있다. 피고인이 형사처벌 받은 기록이 없거나,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경우에 적극적으로 집행유예를 검토하도록 기준이 정해져 있다. 다른 재판부가 판결했더라도 똑같이 집행유예를 선고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의 특성상 가해자는 ‘초범’이 되기 쉽다.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데다, 용기를 내 신고하더라도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일반 형사사건이 아니라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가해자는 형사 ‘처벌’이 아니라 접근제한·보호관찰·사회봉사 같은 ‘처분’을 받는다. 당연히 전과도 남지 않는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9월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검찰로 송치된 가정폭력 사건 총 4만9286건 가운데,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된 건수는 1만7311건, 36%에 이른다. 가정폭력 사건 가해자 3명 중 1명은 전과가 없는 ‘초범’으로 남는 셈이다. 실제로 올해 8월 언론 보도로 알려진 이정훈 강동구청장의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됐다.

또다른 집행유예 ‘긍정 참작사유’인 처벌불원 조항 역시 가정폭력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문제적 양형기준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제적 이유, 자녀 양육 문제 등 복잡한 이유로 억지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을 읽지 않고 단순히 합의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풀어주면 이번과 같은 결과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상당한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지난 8일 열린 ‘젠더폭력 범죄와 양형’ 심포지엄에서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표시를 했으나 재판부가 여러 사정을 고려해 양형에 반영하지 않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집행유예를 무죄와 거의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해자는 거리를 활보하며 일상을 찾아가고, 피해자가 오히려 위해를 당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해자를 피해 다니는 실정이다. 집행유예 양형인자들을 좀 더 신중하고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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