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서평생활] 치사했던 가족 때문에 괜찮지 않았던 또 다른 이야기

장슬기 기자 2021. 11. 2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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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서평생활]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지음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가족은 치사하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치사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마 못 했겠지만 가족이기에 치사한 일을 저지른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한다. 더럽고 치사해도 그런 게 가족인가보다 하며 체념한다. 어쩌겠나, 치사해도 가족인데.

어떤 가족은 여유가 많다. 소득과 재산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힘이 얼마나 충분한가의 문제다. 너그러움의 크기다. 경제상황일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한 이해의 깊이나 교양과 감수성의 수준, 시간적 여유를 포함한다. 여유가 있으면 가족 간 관용의 폭이 넓어지고 가족들이 상처를 덜 받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 가족은 여유가 부족하다. 넉넉하지 않아 관대하기 어렵다. 서로를 돌아다 '볼' 틈조차 없다면 서로의 아픔을 보듬을 시간도 없다. 치사해진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태어나자마자 보호자에게 분리해 '자립'할 수 없어서 가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유가 없는 가족에선 미성년 자녀도 성인의 언행이나 역할이 기대된다. N분의1 몫을 감당해야 하는, 분업의 원리를 강제한다. '밥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분업에 동참해야 한다.

부모가 맞벌이하러 가면 첫째는 동생을 챙겨야 한다. 어쩔 수 없지 않나. 가끔 TV에 나오는 8남매, 9남매 이야기를 보면 첫째나 둘째(특히 장녀)는 청소년기에 자신이 낳지도 않은 어린아이들을 챙기는 역할을 떠맡는다. 부모에게 사랑받을 권리, 친구와 놀권리, 사생활을 모두 박탈당한 이들의 괴로움을 뭐라고 칭해야 할까. '동생 육아 스트레스'라는 생소한 용어로 적절할까.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지칭하는 단어가 낯선 이유는 이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없어서다.

이들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유 없는 부모의 짐을 나눠지고 있다면, 비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유 없는 부모에게 외면당한 사람들이 있다. 집안에 장애인 형제·자매가 있고 본인은 비장애인인 '비장애형제'들이다.

이들은 강제로 일찍 철든다. 부모는 장애가 있는 자녀를 돌보기에도 벅차다. '비장애형제'는 미성년자라도 스스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어른들은 그들을 '착한 아이'라고 칭찬한다. 그게 나쁜 건지, 불리한 건지 판단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어른스러움'을 강요받는다.

비장애형제들이 서로 만났다. 발달장애와 정신장애를 포괄하는 '정신적 장애인'을 형제로 둔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고충을 나누기 시작했다. 보통 어린시절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어른이 돼서 발현된다. 장애형제에 대한 분노, 부모를 향한 원망 등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한 채 '천사 같은 아이'로 살 것을 압박당했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장애형제만 챙기는 모습에 “엄마, 나는?”이라고 외쳐봤지만 거절당한 경험이다.

▲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지음/ 한울림스페셜 펴냄

비장애형제 자조모임의 이름은 '나는'이다. 있지만 (보살핌이) 없는 존재로 살아왔던 이들이 내뱉었던 “엄마, 나는?”의 '나는'이다. 비장애형제의 이야기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비장애형제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란 책이 생소하면서도 의미 있는 이유다.

책에는 6명의 비장애형제들이 가명으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6명이 대부분 여성으로 보이는데 굳이 비장애남매나 비장애자매가 아닌 비장애형제로 썼는지는 의문이지만) '다 커서도 아직 엄마한테 사랑 못 받는다고 투덜대나', '부모를 봐서 좀 참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꼭 장애형제와 경쟁해야 하냐' 등의 선입견으로 이들의 삶을 판단해왔던 독자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다.

책에는 비장애형제의 입장이 되지 않고, 기존 편견으로 접근하면 비난의 소지가 될 만한 '날것'들이 등장한다.

“자식 농사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식을 밭에 비유하자면, 장애형제는 망한 밭, 작물을 심을 수 없는 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비장애형제는 작물을 심으면 자랄 수 있는 밭이고요. 물론 그 밭에 항상 풍년이 든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저는 부모님이 가능성이 있는 쪽에 좀 더 집중해줬으면 좋겠어요.”(180쪽)

이는 자조모임 '나는'에서 한 참가자가 용기내 한 발언인데 비장애형제 '소진'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부모가 충격 받을까봐 이러한 말을 해본 적은 없다. 금기에 가까운 이런 생각을 말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비장애형제 '해수'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조차 찾기 어려웠다. 경미한 자폐성 장애가 있는 동생을 자신의 상견례 자리에 데리고 가도 될지에 대한 고민이다. 동생이 불쑥 크게 말하거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할 경우, 배우자가 될 사람의 가족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해수는 검색창을 열고 '상견례 예절'을 검색했다. 당연히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상견례 장애'라고 검색하니 “상견레 장소를 잡아야 하는데 결정장애가 왔어요”라는 황당한 질문이 대신 등장한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짊어지듯 '나는' 안에서도 고민의 종류는 서로 다르다.

▲ 유튜브 채널 '나는, 대나무숲 티타임' 갈무리

많은 양육자의 고민이 그렇듯,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비장애형제들은 2016년부터 '대나무숲 티타임'을 운영하며 모임을 이어왔다.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진행한다. 유튜브 채널 '나는, 대나무숲 티타임'에서는 시청자에게 받은 사연을 토대로 생각을 나누고 있다.

장애인이자 변호사이면서 글을 쓰는 김원영 작가는 추천의 글에서 비장애형제들에게 “이제 고개를 들어 당신의 숨을 쉬어도 괜찮다고 이 책이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아야만 했던 이들이 진짜 괜찮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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