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이후, 너와 나의 절박하지만 유쾌한 발걸음

한겨레 2021. 11. 2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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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너에게 가는 길
성소수자 부모인 나비와 비비안
아이들의 커밍아웃 받은 뒤
새로운 관계 맺기 배우며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하기까지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 출연한 나비(왼쪽)와 비비안. 엣나인필름 제공

한국에도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있다. 성소수자의 부모와 가족, 그리고 당사자들이 함께 하는 비영리 인권단체다. 2014년에 성소수자 가족들의 자조모임으로 시작한 이 모임은 지난 7년 간 월례정기모임, 성소수자 인권교육, 성소수자 가족들 간 네트워킹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이 성소수자부모모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7년 동안 벽장 속에서 외로웠어”

소방공무원 34년 차인 ‘나비’의 아들 ‘한결’은 FTM(female to male) 트랜지션 과정 중인 트랜스젠더다. 처음 한결에게 커밍아웃을 받았을 때 나비는 혼란스러웠다. 나비는 “남자가 되고 싶어”라는 아이의 말을 듣고서 “이 사회에서 여자가 차별을 받고 부조리한 것이 많으니까, 그래서 여자로 사는 것이 싫어서 남자가 되고 싶은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비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구실에 불과했고, 나비의 이런 반응은 한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후로 아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아들의 이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비는 비로소 아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항공 승무원으로 27년 째 근무 중인 ‘비비안’의 아들 ‘예준’은 남성 동성애자다. 국제선을 타면서 수많은 게이 커플을 봐왔지만, ‘내 아들’이 게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커밍아웃 편지였다. 아들은 말한다. “7년 동안 벽장 속에서 외롭고 힘들었지만, 엄마 아빠한테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용기를 내서 말한다. 엄마 아빠는 기뻐하셔도 된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것을 믿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하는 거니까.” 편지를 읽은 비비안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저 울었다. 그러나 아들의 솔직한 자기고백은 결국 가족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었다.

한결과 예준의 커밍아웃이 절박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품고서 한 방울, 두 방울, 비비안과 나비의 세계에 떨어지자, 이들의 삶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났다. 다큐는 그 역동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풍경을 관객들에게 진솔하게 전달한다. 비비안은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루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나와 아들과 그의 연인이 만들어갈 또 다른 가정을 꿈꾸며 동성결혼합법화 운동에 동참한다. 그는 부모와 자식 사이를 결정하는 건 단단한 위계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 간의 만남임을, 예준의 커밍아웃을 통해 배웠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엣나인필름 제공

나비 역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왔다. “가족이란 ‘나의 뿌리’이기보다는 환상 같은 거예요. 나의 뿌리는 내가 만드는 거죠.” 나비는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가족에게서 어떤 위로를 받는 사람을 보면, 다복하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가족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더 다행이다. 더 튼튼해지겠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와 아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이 마법과도 같은 상호 작용 안에서 가족의 의미는 다시 쓰인다. 가족이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함께’를 만들어 가는 과정 그 자체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게 낳아서 미안하다.” 처음 예준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을 때 비비안이 한 말이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내게 와준 아들을 향해, 마찬가지로 마음을 열고 용기를 내서 다가가는 시간을 통해 성소수자 정체성 자체가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당당하고 뻔뻔하게도 “당신의 존재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사회야말로 문제의 본질이다. 최근 나비와 비비안이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를 위해 나선 이유다.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본격화된 지 벌써 14년째다. 2007년 17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국회가 구성될 때마다 새로운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지만 번번이 폐기되었다. 그때마다 정치인들은 ‘사회적 합의’를 운운했다. 하지만 이미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인식조사에서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2021년에는 국민 10만 명이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청원에 동의했다. 국회는 국민동의청원이 달성되면 90일 내에 심사를 해야 하는 국회법까지 어겨가며 법안 심사를 미뤄왔다. 그리고 지난 9일, 법안 심사를 또 다시 2024년 5월29일로 미루었다. 이 날은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날이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엣나인필름 제공

차별금지법, 시민은 준비됐다

다큐는 커밍아웃을 하는 한결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나는 트랜스젠더 ○○이의 엄마 ○○○입니다”, “나는 게이 ○○이의 아빠 ○○○입니다”라고 말하는 부모들의 커밍아웃으로 마무리된다. 커밍아웃은 한 번의 발화, 한 번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커밍아웃은 관계적 사건이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커밍아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커밍아웃은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존재한다. 하지만 커밍아웃이 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한쪽이 주고 한쪽이 받는 순간을 넘어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나는 퀴어다”라는 커밍아웃에 “나는 퀴어의 가족이다”라는 응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차별금지법이 우리의 삶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국사회에 뜨겁게 커밍아웃했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한국사회는 이 커밍아웃을 받고 “한국은 성소수자의 나라입니다, 한국은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땅입니다”라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너에게 가는 길>이 시민사회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파장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시민들은 준비가 되었다.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만 정치적 고려 안에서 14년째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2021년 11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거대한 화학 작용을 극장에서 만나보시기 바란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놓치는 건, 참 아까운 일일 테니까.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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