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경계에서.. 경계를 잊은 예술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1 DMZ Art & Peace Platform'展
국내외 작가 30명 Uni마루·파주 등서
비무장지대 주제로 작품 전시회 열어
그래픽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 '이곳/저곳'
양혜규 '비대칭 렌즈 위 철새' 등 주목
"무장할 수밖에 없는 비무장지대서
무장하지 않을 수 있는 일 해내
예술이 자유롭다는 말 비로소 실감"
살다 보면 비현실적인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실제 같지 않은 상태를 몸으로 느끼는 일. 그래서 그 일은 꿈같지만 드물기에 잊히지 않고 오래 머무른다. 이번 가을 ‘평양’, ‘개성’이라고 쓰인 도로 안내표지판을 따라 차를 타고 달리는 경험을 했다.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세상 어디보다 멀게 느꼈던 도시이지만, 사실은 지척에 있음이 보였다. 순간 모든 것은 아득해졌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DMZ 안에서 ‘2021 DMZ Art & Peace Platform’ 전시가 열렸다. 통일부 남북출입사무소 주최, 주관으로 Uni마루, 파주 철거 GP, 도라산역 등 총 5곳에서 진행했다. 예술감독인 정연심 홍익대학교 교수는 이 장소들에 국내외 주요 작가 약 30명을 모았다. 강이연, 남화연, 마르예티차 포트르치(Marjetica Potrč), 스튜디오 아더 스페이스(Olafur Eliasson, Sebastian Behmann), 슬기와 민, 양아치, 임흥순,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ys) 등이다. 작가들은 ‘경계 없는 DMZ, 그 아름다운 평화’를 주제로 삼아 작품을 제작, 선보였다. 작가별 초점에 맞춰 국가와 개인, 생태계, 소통 등 다양한 내용으로 다뤄져 복잡한 의미를 지닌 비무장지대를 제시했다.
#슬기와 민, 이곳/저곳
슬기와 민은 최슬기, 최성민으로 이루어진 그래픽 디자인 듀오다. 서울 도시 건축 비엔날레, 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등의 그래픽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조르주 페렉 선집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갤러리 팩토리, 페리지 갤러리, 휘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워커아트센터,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아우르는 시각영역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슬기와 민은 Uni마루 옆 공터에서 대형 타이포그래피 ‘이곳/저곳’(2021)을 작업했다. Uni마루는 DMZ 안에 생긴 첫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통일을 의미하는 영문 ‘Unification’과 플랫폼을 뜻하는 한국말 ‘마루’에서 이름을 따왔다. 즉, 통일의 플랫폼인 이 공간은 본래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임시 출경사무소 역할을 한 건물이다. 출경은 남과 북의 사람들이 오갈 때 출국 대신 사용하는 단어다. 전시를 준비하며 국립현대미술관을 설계한 민현준 건축가가 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공터에서 작업한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Uni마루의 옥상에 올라간다. 드문드문 세워진 건물들만 보이고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참 동안 고개를 돌리다 지쳐갈 때쯤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 넓게 비어 있는 땅 바로 위에 하얗게 그려진 원형과 직선이 그어져 만든 글씨다. 뒷걸음질쳐 멀리서 관망하면 글씨는 제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바로 ‘이곳’ 그리고 ‘저곳’이다.
비무장지대는 남북 각각 2㎞ 지점까지 폭 4㎞, 길이 248㎞에 이른다. 넓고도 길게 펼쳐졌지만 아무도 갈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기에 ‘이곳’도 ‘저곳’도 아닌 장소다. 전시는 이와 관련하여 작가가 작품에 의도한 바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이곳/저곳>은 존재하지 않는 곳, 아무곳도 아닌 곳을 다시 구체적인 장소로 선언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 …’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곳’을 ‘이곳이자 저곳’으로 바꾸어 부르는 연습이다.” 커다랗게 쓰인 글씨를 읽으며 홀로 묻는다. ‘언젠가 남, 북, 출경이라는 개념을 이곳, 저곳, 방문이라는 일상의 언어로 대신하는 날이 올까?’
양혜규는 동시대 미술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자기만의 시각언어로 흔히 무관하게 여기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읽어왔다. 이를 통해 사회적 주체, 문화, 시간이라는 개념에 주관적이며 다원적인 접근을 제시한다. 다수의 전시 중 최근 주요 개인전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필리핀 마닐라 현대미술디자인박물관 등에서 열렸다. 1994년 독일로 이주하여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 현재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높은 볼프강 한 미술상을 받았다.
양혜규는 파주 철거 GP에서 ‘비대칭 렌즈 위의 DMZ 철새 - 키욧 키욧 주형기舟形器 (흰배지빠귀)’(2021)를 선보였다. 파주 철거 GP는 본래 비무장지대에 존재했던 최전방 감시초소 중 하나였다. 2018년 ‘9·19 군사분야 합의서’에 의해 감시초소 11개를 시범 철거하며 이 건물도 사라졌다. 초소가 사라진 장소는 2019년 ‘DMZ 평화의 길’을 조성하며 평화의 땅으로 국민에게 문을 열었다.
파주 철거 GP에 들어서면 그 가운데 자리 잡은 하얀 무언가가 드러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는 하얀 물체는 돌로 제작한 거대한 설치다. 원형의 설치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폭이 좁아지기도, 넓어지기도 한다. 그 오묘한 모습 위에 투명한 물체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엔 새가 앉아 있다. 제 속을 다 드러낸 작은 새를 두루 살펴보면 처음에 알아채지 못한 모습을 의식하게 된다. 옆에서 보면 머리와 몸통이 절단되어 있고, 정면에서 보면 한 마리로 보인다.
박노해 시인은 언젠가 황폐한 땅에 사과나무를 심는 카슈미르 사람을 촬영했다. 그리고 인도군의 계엄령이 임시 해제된 첫날, 긴장 속에서도 사과를 보살피는 그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썼다. 남자는 30년 동안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왔고 그 가운데 천 그루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절반이 되지 않는 나무만 가지를 뻗어냈더라도 사과를 맺는 한 그것은 여전히 희망의 상징이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의 깨달음을 남겼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이번 전시의 의미는 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 안에서 무장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을 해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술이 자유롭다는 말은 이럴 때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색된 한반도 상황 속 전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지만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카슈미르의 사과나무 심는 사람처럼 한결같음으로 끝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언가 하기 어려운 DMZ에서는 미술은 작은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대안일 수도 있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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