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세상을 모방 않고 시대의 진실을 그리다

한겨레 2021. 11. 2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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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1746~1828)
나폴레옹 군대의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3일'은 평화 메시지
종교 등 지배권력을 비판하고
자유와 휴머니즘 추구한 선구자
고야의 자화상. 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지난 8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전시됐던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참조한 것은 고야의 <1808년 5월3일>이다. 그날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을 나폴레옹 군대가 무참하게 학살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고야는 침략에 대한 민중의 치열한 저항을 기리고 권력의 민중 탄압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런 참혹이 두번 다시 없도록 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고야는 스페인 민중과 나폴레옹 군대의 치열한 전투를 묘사한 <1808년 5월2일>도 그렸다. 그 전투 다음날에 위 그림의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1808년 5월3일>은 한국에서 곧잘 오해된다. 군인들의 학살은 6·25나 광주를 뜻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이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을 단순한 역사기록화가 아니게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그림이다. 기계처럼 묘사된 학살자와 달리 희생자는 죽음에 처한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 의연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죽음 앞에 영웅주의는 없다. 애국심이나 적개심의 열광이나 민족의 패배를 슬퍼하는 감개가 없다. 비애나 연민도 없다.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3일’. 위키피디아
‘1808년 5월2일’ 나폴레옹 군의 학살이 이뤄지기 하루 전에 있었던 스페인 민중과 나폴레옹 군의 전투 장면. 위키피디아

화가는 밝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냉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가해자와 희생자를 묘사하고 있다. 곧 기계적인 살육자와 전쟁에 희생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뿐이다. 고야는 시민의 저항을 영웅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의 인간을, 그 나약함을, 그 비인간화를 여실히 고발한다. 그 그림들은 전쟁의 승리를 이룬 왕이나 장군을 예찬하거나, 전쟁에서 인간을 과장되게 그리는 전통적인 전쟁화와 달리 전쟁을 참화 그 자체로 그린 것이었다.

계몽사상과 이성의 환상을 넘어

두 그림은 고야의 대표작이자 미술사에서 학살과 저항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그림은 ‘아직도 배운다’라는 제목의 작은 판화이다. 죽기 직전에 그린 이 그림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토어 프랑클(빅터 프랭클)이 말한 비극적 낙관주의(tragic optimism)를 잘 보여준다. 프랑클은 1985년에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장에서 `인간은 고난과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1746년 스페인의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야는 마드리드의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두번이나 실패한다. 그 뒤 어렵게 그림을 그리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 겨우 화가로 인정 받지만 만년에는 두번이나 중병에 걸려 청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 예순이 넘어 전쟁의 참화를 목격해야 했던 일이야말로 그에게는 최대의 고난이었다.

19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나폴레옹이 보낸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혼돈에 휩싸였다. 계몽사상에 따라 스페인을 다스리고자 한 프랑스와, 계몽사상을 적성 사상으로 배척하며 구제도를 보수하려는 스페인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같은 투쟁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고야는 어느 쪽이나 폭력을 시작하면 그 악순환에 젖고, 특히 계몽사상이 침략과 억압과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 점에서 그는 비판적 휴머니즘의 걸출한 사상가였다.

고야가 말년에 그린 ‘나는 아직도 배운다’. 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고야는 저항과 학살의 5월을 그린 역사기록 그림 외에도 대량의 소묘와 판화를 남겼다. 소묘와 판화는 이러한 공공성이 짙은 그림들과는다른 화풍으로, 동시대의 규범을 넘어 화가의 자유로운 탐구를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인류에게 호소력을 갖는 그림들이다. 그것들은 그의 계몽사상을 대표함과 동시에 그것을 넘는 측면인 비판적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의 모방’이라고 하는 그림을 ‘개인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그리는’ 것으로 바꾸었다. 즉, 관중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면서 아름다움과 조화에 의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전통 그림의 목적을 ‘세상의 진실을 탐구’한다는 새로운 목적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침잠하여 그 속에 나타난 괴물의 모습을 인정하여, 가시적인 것을 넘어 불가시적인 것을 그린 것이다. 이는 계몽사상이 이성을 찬양하고, 비이성이나 광기를 이성의 결여로 본 것과 달리 고야는 인간이 보는 악몽이나 환상도 이성이 낳은 것이고, 이성과 비이성은 모두 인간의 특징이라고 보았음을 뜻했다.

종교재판을 비판한 ‘변덕’ 연작 판화

그는계몽주의에 의한 새로운 인간상을 갈구했으나, 민중은 언제나 고통을 당한다.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이다. 그 권력을 대표하는 종교재판을‘변덕’(카프리초스)이라는 80점연작 판화에서 비판하여 교회의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고야의 비판 정신을 보여주는 걸작은 ‘전쟁의 참화’ 연작 판화이다.

종교권력을 비판한 변덕 연작 시리즈의 한 장면. 위키피디아

고야가 참으로 우리 시대의 민중화가이지 고전화가가 아닌 이유는 같은 시대의 고전주의, 예컨대 프랑스의 다비드가 보여주는 애국적 영웅주의의 잔재가 없다는 점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고야의 민주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고야는 지배계급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가한 화가인 점에서 우리 시대를 개막한 가장 위대한 화가이다. 낭만주의는 고야 이후에 나타났으나, 시대정신의 구현에서는 고야에 훨씬 뒤졌다.그것은 낭만주의가 시대를 추종하는 보수를 벌써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야는 우리 시대의 선구였다. 그는 당대의 정신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읽었고, 그것을 처절하게 표현했다. 그는 혁명 당시의 흥분된 낭만주의를 훨씬 넘어서서 자연주의를 거쳐 리얼리즘, 인상파 그리고 표현파로 나아가는 19~20세기 미술의 나아갈 길을 모두 밝혀준 위대한 화가였다. 고야만큼 그 시대를 철저히 살고 미래가 나아갈 길을 밝혀준 화가는 다시없다.

고야는 민주 조국을 보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 고야가 열광한 1820년의 혁명도 침략자 프랑스의 간섭으로 3년 만에 끝나고, 전제정치가 부활했다. 그 후 스페인은 1930년대의 인민전선과 시민전쟁을 거쳐 프랑코의 독재를 오랫동안 감수해야 했다. 1970년대에 민주화를 맞은 스페인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시대적 고뇌의 동질성 때문이리라.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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