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의 귀환 : 장석 시인이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2021. 11. 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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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장석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 강

[황광우 작가, 인문연구원 동고송 이사]
1. 풍경의 꿈

평론가 이승하는 시인 장석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은, 시 애호가(philoproser)이다. 그는 회고한다.

“1980년대 신춘문예 당선 시 중 내가 최고로 꼽는 작품은 1980년 조선일보 당선작인 <풍경의 꿈>이다. 이 시를 거의 매년 학생들에게 복사하여 나눠주고 낭독을 시켰기에, 암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한낮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 나의 것인 뜨거운 꿈 하나가/그 근처에 벌써 앉아 있었다/구름의 흰 살에 일어나는 물결들/나는 원했다/삶의 한 순간의 질인 강렬한 빛의 혼례를/설레이는 분만의 풍경을/더럽혀진 풀의 형상으로 천지의 낮은 중심에서 새들이 눈뜨고 있었다/새여/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2-161)

40년 동안 당선작 외에 한 편의 시도 안 보여주던 시인이 150편의 시를 묶은 2권의 시집을 들고, 장고처럼 석양의 시단에 등장하였다. 등단 직후, 홍안의 청년이던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지금껏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2권의 시집을 만나니 반갑기가 황홀할 정도다.”

이승하처럼 시인의 귀환을 맞이하는 또 한 명의 시 애호가가 있다. ‘천랑’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이다. 그는 고백한다.

“1980년 ‘서울의 봄’, 폭도의 시간으로 빠져들 때, 쫒기며 읽은 이 시 <풍경의 꿈>은 내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다. 이 시를 쓴 장석은 사라졌다. 우주의 심연 속에 닿아 있던 한 시인을 기억하고 지금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1980년 4월의 한국 시단에는 두 명의 신예가 등장하였다. 한 사람은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전자는 <연혁>을 쓴 황지우 시인이고, 후자는 <풍경의 꿈>을 쓴 장석 시인이다.

시인도 사람이다. 성스러워 보이는 시인의 외관과 달리 시인도 인정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형 황지우는 밤새 긁은 원고뭉치를 노란 봉투에 담아 동생에게 주면서, 형과 아우의 관습인 그 권위적 힘에 기대어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와.”라고 명하면서 “절대 입 밖에 내면 안 돼.”라고 주문하였다. 그때 나는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시인의 표정을 보았다.

1980년 4월 황지우가 시인의 월계관을 쓰고, 지인들의 축하 인사를 건네받던 수선스러웠던 봄은 ‘천랑’의 표현 그대로 ‘폭도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오월 십팔일 아침, 형과 나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어디론가 사라지기로 하였다. 두 아들이 어머님께 잠시의 피신을 고할 때만 하더라도, 한 달 후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장장 십오일 간의 악형을 당하게 될 줄은, 젊은 몸이 송장이 되어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황지우가 당한 고문은 김근태가 당한 고문과 맞먹는 악형이었다. 시인이 당한 고문에는 동생의 몫도 들어 있었다. 세수를 하면 코에서 비릿한 물 냄새가 난다며 출옥하고서도 아침마다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시를 쓰지 않고선 살 수 없었다. 그 개 같은 세상,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였다. 형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세상에 내놓았고, 김수영 상을 수상하였으며, 김현과 이성복과 함께 어울리며 방배동 카페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장석은 시를 쓰지 않았다. 1980년 등단과 함께 입대하였다. 1982년 가을, 개구리복을 입고 복학을 하였으나 친구는 시를 쓰지 않았다. 세상과 통(通)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숙명일진대 그라고 시를 쓰고 싶지 않았을까? 한 편의 시를 상재하고 4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시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우리 시대가 기록하는 또 하나의 신화였다. 왜 쓰지 않았을까?

“장석 시인은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경의 꿈’ 한 편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이고 손을 턴 것 같다.”고 시 애호가 김미옥은 단정하였다. 그의 주장은 짧은 의견이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그치나니,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가노라” 시인의 샘에 어찌 시의 새 물이 고이지 않았을 것인가?

장석은 시작(詩作)을 거부하였다. 천부적인 시재를 잉태한 청년이 시 쓰기를 거부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혹, ‘시대와 시인 사이의 불화’가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불화의 한 축은 시인 자신에게 있었다. 시인이 <풍경의 꿈>에서 본(idein), 돈오(頓悟)한 '그곳의 세계‘는 강렬하였다. 그 세계의 무늬는 장엄하였고, 빛의 혼례는 눈부셨다. ‘동굴 속의 죄수‘가 동굴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만 대낮의 햇빛에 눈이 멀듯,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그리고 호수에 비추이는 나무의 그림자를 보면서 자신의 시각을 조금씩 회복해가듯, ‘초신성의 빛‘을 목도한 20대의 청년은 순간 눈이 멀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조금씩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그 침묵의 시간은 시인의 영혼이 ‘햇빛의 눈부심’에 조금씩 적응하는 기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불화의 또 다른 축은 시대에게 있었다. 야만의 시대, 죽음의 시대, 혁명의 시대는 이 여리디 여린 청년에겐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칠었다. 민중을 계몽하는 시, 혁명을 선동하는 시가 아니면 모두 반동의 시로 매도당하는 풍토였으니, 한편으론 정당하고, 정당하기에 더욱 위압적이었던, 시인의 혼을 무릎 꿇게 하는 이 폭력적 요구 앞에서 시인은 다투느니 차라리 붓을 놓아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시인에게 시대의 옷은 입기에 너무 무거웠던 것 같다.

“80년 4월 입대하고 2년 뒤 여름에 복학해 선배들과 문학 무크지 <문학의 시대>를 내려고 준비했어요. 그런데 시 쓰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한 제가 시를 쓰기 힘들었어요. 70년대에도 참여시가 있었고 민중문학이란 말을 쓰기도 했지만 군대를 다녀와 보니 층위가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혼란과 혼돈이 있었죠. 강한 시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83년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는 대신 세상을 떠돌아다녔어요.”

고백에 의하면 시인은 문학 무크지를 준비했다. 시인의 절필을 강제한 범인은, 시인의 여린 영혼에 상처를 낸 범인은 이 근처에 있었다. 그 시대, 문예운동가를 자처하는 분들은 유달리 언사가 화려했고 과격했다. 관념적이었고, 현학적이었다. 민중을 노래한다면서 가장 반민중적인 언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시대의 문건을 뒤져 보시라. 골방에서 글을 그적거리는 것으로 시대의 의무를 수행하는 문예 운동가들은 언어의 과격함으로 현장 부재를 대체하였다. 시대는 거칠었고, 사람들은 어렸다. 이들이 쏟아내는 유아적이고 거친 비평을 장석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그리하여 어쩌지 못하고 시인은 유랑에 들어간 것이다.

시인의 눈은 빛나면서도 늘 우수(憂愁)에 차 있었다. 시인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말하기를 수줍어하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떠돌아다녔는가? 아웃사이더가 아웃사이더인 까닭은 거친 세상과 악다귀로 싸우기엔 마음이 너무 여리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린 마음으로 나는 체제의 아웃사이더로 살았고, 친구는 존재의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시인은 이렇게도 고백했다. “그 시대가 저에게 시를 못 쓰게 한 게 아니라 저의 나약함이나 결핍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 거죠. 제가 문학적으로 미성숙했죠. 그 과정을 거쳐 깨지기도 하고 비판도 받고 그러면서 지금 제 시의 형식을 튼튼하게 갖추었다고 생각해요.”

시인은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다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카프(KAPF)의 교조와 타협할 수 없었다. 문학이 혁명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카프의 소아적 교조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문학이 왜 계급해방의 도구가 되어야만 하는가? 문학은 인간해방의 마당이 아닌가? 이런 자문이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마음이 여렸다. “내가 포기하자...”

시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중력을 견디면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서울대 국문학과 77학번인 시인은 85년 졸업장을 받고 바로 부친이 개척한 통영바다 ‘굴밭’으로 내려갔다. 바다는 시인에게 삶의 현장이었다.

“생활에 단단히 발 딛고 있을 때 좋은 시가 나옵니다. 젊었을 때는 생활이 몸 안에 있을 수 없죠. 굴 농사를 하며 만나는 동료들은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가장 고마운 분들이죠. 제가 젊었을 때 만난 민중이란 말이 허황하고 잘못된 게 아니었어요.”
▲장석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2020-03-03 ⓒ강

2.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 1집

나는 시인의 방랑을 몰랐다. <풍경의 꿈> 한 수를 낡아 올리고 아예 시의 낚시질을 폐업했다는데, 그 사연을 몰랐다. “쓰지 못한다는 두려움, 쓰지 않겠다는 위악”도 있었고, “시적 긴장의 시간들을 피해버렸던” 용기 없음을 시인은 우리 앞에 자백하였으나, 나는 시인의 내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하였는지 모르고 살았다.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를 받아 읽었다. 그런데 참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윤동주와 백석의 시어에 익숙한 내가 장석의 시어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 난해한 일이었다. 윤동주와 백석의 시에서는 시어와 메시지가 명시적이었다. 이렇게 시의 구구단이나 외우며 사는 내가 장석의 시를 이해하는 것은 시의 미적분을 푸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평론가 정호웅의 도움을 받기로 작정하였다. 정호웅의 손에 이끌려 장석의 숲을 더듬었다. 나는 정호웅과 함께 ”장석의 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론가 정호웅은 장석의 시 세계를 이렇게 풀이하였다. “자연, 신, 인간 앞에 겸허한, 성실·이타·헌신의 정신이 연, 스스로 켠 불로 아름답고 환한 세계“. 마치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이끌고 지옥을 설명하여 주듯이, 정호웅은 장석의 시 세계를 해설하여 주었다. ”생명의 자생력에 대한 믿음과 예찬의 눈에 포착된 생성의 동적 이미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더는 정호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고교 시절 대학 입시를 위해 억지로 떠먹던 평론가들의 스테로타입(streotype)의 언어들 앞에서 나는 정호웅의 손을 놓아버렸다.

분명 장석의 시엔 장석만의 문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시집을 열었다. 일제 치하 고등계 형사가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듯, 나는 종로 경찰서 형사가 되어 방금 체포된 시인을 취조하였다. 시인은 완강하게 입을 다물었다. 뒤져보니 시집은 암호로 기록된 수첩이 아닌가! 나는 내 손으로 시집의 암호를 풀기로 하였다.

먼저 시인이 애용하는 <그대>라는 단어에서 수사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곳의 <그대>는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당신’, ‘나를 아끼는 당신’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You, loved'가 아니었다. 보자. “그대와 나 사이의/문틈”(1-22)에서 “그대와 나”는 “You and I"가 아니었다. 시인만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실체였다.

“내 가슴에 밀물로 들어온 것은/그대인가/가을인가/이윽고/그대와 가을이/썰물처럼 내게서 물러가 버리면“(1-120)에서 <그대>는 가을이고, 가을의 이데아이다. <그대>는 장석의 시혼이 만나 대화하는 시의 이데아가 아닌가?

“바람은/내게서 그대에게로/섬과 섬 사이로/불어간다”(1-54)에서도 <그대>는 시인만이 감지하는 시의 이데아이고, ”노래와 사랑과 흰 눈/흰 눈 내리던 그대”(1-61)에서 <그대>는 시인이 경모하는 시의 절대정신이며, “멀리 그대에게 가는 것입니다/그대 숲으로요/내가 그대를 보내듯 그렇게 멀리요”(1-140)에서 <그대>는 시인이 늘 그리워하고 품에 안기고 싶은 시인의 베아트리체였다.

이렇게 하여 시집에 등장하는 암호 <그대>의 신원조회를 마쳤다. 그랬더니 이제 <나>의 의미가 새롭게 포착되었다. 유년의 추억을 더듬는 시들에서 나오는 <나>는 물론 유년 장석임에 분명하다. “나는 아버지 어깨 위로 올라갔다.”(1-16)에서나 “남은 이빨 하나/잃어버린 나”에서나(1-29) “종전 삼 년 후/나도 포탄에 찢긴 땅을 덮는/한 포기 풀처럼 돋아났다”(1-34)에서나 <나>는 유년의 장석임에 틀림없다. The 'I' must be a pronoun of 장석 when he was a child.

그런데 이상하다. 아니 수상하다. 시집 전편에 깔려있는 <나>는 내가 아는 친구 장석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니었다. <나>는 존재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자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쥐는 자”였다. 정녕 <나>는 히말라야 숲속의 구도자를 함의하는 단어였다. <나>는 세속의 장석이 아니라 시의 숲에 가부좌하면서 존재의 이면을 관조하는 ‘求道者’ 즉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세상의 작은 아이”(1-125)라고 하였다. 그 <나>는 우주의 신비를 탐색하는 호기심어린 시인이었다. “나는 두 가지를 아는 사람이다/죽음을 늘 아는 사람이고/사랑을 아는 사람이다”(1-128)의 <나>는 삶과 죽음의 철리를 득도한 현자였다. “나는 멀리 와 있습니다/새 별에 와 있습니다”(1-142)라고 편지를 보냈듯이, 시인은 이 땅별을 떠나 저 별로 간 존재의 아웃사이더였다.

이렇게 <나>의 정체에 관한 신원조회를 마치고 보니, <나>와 <그대>는 장석의 시 세계를 열어가는 두 주체였다. <나>는 <그대>를 찾아 방랑하고 관조하는 시 세계의 주체였다. <그대>는 존재의 깊은 곳에서, 심해에서, 우주의 별에서, 숲에 은거하면서 시의 빛을 뿜는 시의 이데아였다. <그대>가 시의 근원이라면 <나>는 근원을 찾아나서는 시인, 노래하는 현자였다.

한발 더 나아가자. <나>와 <그대> 사이에서 빛을 뿜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당신에게는 십일월을 드리겠다/허전한 들판의 서리와 이른 첫눈이나마/ 당신에게 물려드리려 한다”(1-116)에서 ‘들판의 서리와 이른 첫눈’은 시의 정령(精靈, sprits)이다. 마찬가지로 ”불타는 가을 속에서 타오르는 그대를 봅니다”(1-111)에서 ‘불타는 가을’은 시의 ‘sprits’이었다. “조용히 미는 소리/달빛이 문을 두드리다/밤을 조금 밀었네”,(1-106)에서 달빛은 정녕 정령이었다.

“나는 백두산의 아침이다/나의 아침에 마음을 담그게/언제나 나는/백두산의 아침이면서”(1-100)에 나오는 ‘백두산의 아침’은 명백히 정령이었다. “사랑은 세상에 이제 막 태어난 것”(1-12)에 등장하는 ‘바위와 달과 꽃’은 일상의 사물이 아니었다. 혼을 부여받은 정령들이었다. “가을빛 스스로 켠 불”(1-13) 역시 정령의 불이었다. “몽돌들이/바다를 바라보며/조용히 합창을 하고 있는 해변에서”(1-92)에서도 몽돌은 잘 부수어진 조약돌이 아니었다. 몽돌은, 시인에게, ‘해변에서 살아 합창’하는 정령이었다.

이렇게 시를 다시 읽으니 그믐달도, 코스모스도 시인과 함께 이야기하는 귀여운 정령들이었다. “그믐달 분홍빛 아기 손톱처럼/다시 자라거라”(1-102)에서도, “코스모스 춤추기 시작하는/불타는 꽃”(1-113)에서도...

▲장석 시집 <우리 별의 봄> 2020-03-05 ⓒ강

3. <우리 별의 봄>, 2집

그 시절 우리는 현장으로 갔다. 나는 인천의 공장으로 갔고, 벗은 통영의 바다로 갔다. 바다는 시인의 현장이었는데, 시인은 바다에서 매일 시를 낚았다. “술에 쓰러졌던 남자/새벽이 흔드니/바다로 나간다/파도의 멱을 잡겠다는 듯”(2-33) 친구는 시의 멱을 잡았다.

친구는 굴을 키웠다. “넘쳤던 노래는/썰물로 물러나버리고/나의 손에는 빈 굴껍데기 하나/굴의 씨앗은 작은 촉수를 내어 달라붙지만/껍데기의 집을 짓고/생명의 기억으로 다시 살을 키운다”(2-297) 하! 굴의 농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런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시인의 머릿속은 온통 바다였다. 이우 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축시를 지어 주면서도 “이우에서 샘솟아/바다로 흘러가는 많은 어린 강들”(1-160)이라 하였으니 시인에게 세상은 바다였다. 갓 태어난 아이 세윤에게도 출생의 축시를 지어 줄 때도 시인은 아이를 바다라고 불렀다. “칠월에 엄마는 바다를 낳았고/아빠는 바닷속에서/밀물 지어 온 울음소리를 건져 올렸단다/바다는 늘 그리움으로 넘친다/너도 어리디어린 바다를 또 낳아주렴”(1-178)

시인의 감각은 바다로부터 왔고, 바다로 표현되었다. 그의 후각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비린내”(2-15)로 물씬거렸고, 그의 시각은 “바다 가운데 이빨처럼 박혀 있는 그 섬”(1-151)처럼 강렬하였다.

바다는 시인에게 생명이었다. “통영의 봄은 바다와 몸을 섞었는지도 몰라”(2-29)“라며 시인은 바다를 생명으로 보았다. ”바다에는/새로운 생명을 이룰 물음들이/파도를 따라/가득 흐르리라”(2-99)면서 시인은 예언하였는데, 시의 이데아가 눈부시게 현현(顯現)하는 시의 현장, 그곳이 바다였다. “가을이 오면 파도 마루에 인광 빛나면/가을이 오면/가을 바다에 노을 가득하면”(1-46)...

심지어 바다가 있기에 시인의 탄생이 가능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이 항구를 알고 또 당신을 안 이후/바다는 제가 태어나고 자라난 이랑이구요”(1-50)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보면서 시인은 존재의 비밀을 체득한 듯, 현자의 눈빛을 껌벅인다.

“섬과 섬 사이에는/사이가 있고”(1-53)
▲장석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2021-11-15 ⓒ강

4.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3집

왜 시를 쓰냐는 질문에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질문이 시를 만들어요. 시인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지금 하는 행위는 뭔지 물어야 합니다. 시는 질문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답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 시이죠.”

그리하여 시인은 묻는다. “모든 시인이/부끄러움에 몸을 떨며/제 시집을 어둠 속으로 내던진다면/아주 깊이 숨겨진 삶의 비의를/한 번은 찾아 캘 수 있을까?”(3-124)

시인은 이곳의 일상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일상의 외투 속에 숨은 삶의 진상을 들추어내고서야 시인은 쉴 수 있다. “저녁 식사 약속 따위는 취소해버리고/이제껏 미처 하지 못했던/진지한 생각을 하자/죽음으로 떠남은/오래된 일상과 단지 조금 다른 일/생각해보라”(3-11) 그리고 회의한다. “주름살과 벗어진 머리와 검버섯 장식/이 재미있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애써 왔는가”(3-11)

시인은 세계의 비밀(秘密)을 어떻게 보는가? 시인이 세계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비의가 시인에게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준다. 시인의 관조 속에서. 비의는 빛으로 섬광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장석의 시 도처에 빛이 등장한다. “하늘에는 여러 켜의 구름/하얀빛 위에 잿빛/보라는 연두와 몸을 섞고 있었고”(3-13)라고 노래하였다. “가을빛이 불타는 여름을 따라 밤송이 안에서 나온 밤톨 한 개처럼 여기에 왔다.”(116)라고 노래하였으며, “봄밤에 퍼지는 달빛”(1-108)을 노래하였다.

빛이 쏟아지고 소리가 들리나 보다. “깊은 가을밤/은하수 흐르는 소리”(1-123) “이제껏 태어난 적 없는/ 별의 소리”(2-120), “이 밤/ 달과 트럼펫 소리 사이의 너”(2-119).

그렇다. 시는 개시(開示)된 존재의 전시장이다. <석류 시>에서 시인에게 석류는 “깨물 듯한 입맞춤, 몸서리치도록 싱싱한 포옹”(2-128)으로 열렸다. 시인에게 화엄의 “세상은 하나의 꽃이었는가”(1-99)

시인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박각시 한 마리/세 겹 창유리의 피안에 붙어/이 세계의 내부를 보네”(3-115)라고 하였다. “우리 세계의 임계/아틀리에의 바깥에서/햇빛 가득한 안쪽을 들여다 본다”(3-20)

시인은 지금 우주의 비밀을 관조하는 중이다. “밤이면 첨성대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라다본다/가장 멀고 깜깜한 곳에서 어둑한 우리에게 빛을 발산한 너에게”(59) 그리하여 시의 도처엔 우주와 별이 등장한다. “온 우주가 나의 배후다”(2-14) “아주 멀리서 온다는 별빛은/은하수를 범람시키는 폭발과 함께 죽음을 맞는 별은 무량수에 이르렀던 자신 생의 기억을 빛에 실어 보낸다는 거예요”(1-56)

시인은 이곳을 떠나 그곳을 떠돈다. 시인은 외롭게 길을 걷는 자이다. “멀리 나는 멀리 와 있습니다”(1-142)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이는 니체였던가?

하지만 돌아와야 한다. “나는 바다로 내려와/탁발을 나선다”(3-14) 비록 “나는 이 세상의 작은 아이”(1-124)일지라도, “여기는 누구의 땅과 바다인가/바닷새의 울음은 아이의 모국어”(3-136)처럼 이곳이 낯설지라도, 돌아와야 하리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자, 위버멘쉬(Übermensch)는 세계를 창조하면서 스스로 파멸하는 자이다.

그렇듯이 “늙은 시인이여/이제/불량한 세상에 불타오르는 주먹을 날리고/손바닥 가득 담긴 시를 보여다오.”(2-72) “삶은 신성한 정지이며/그의/그림자인 풍경만이 변모할 뿐이다”(2-163)고 선포했던 그 장엄함으로 돌아와 이곳의 사람들을 “풀과 시를 뜯어 먹은 흑염소도/시인이 되는 섬”(3-73)으로 이끌어 달라.

5. 벗 장석의 시 잔치를 기리며

눈부신 청춘이었다.
그때 우리는 몸도 얼굴도 눈매도 모두 빛이었다.
잔인한 사월이라고들 하지만
사월
너와 내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아크로폴리스 옆
사월의 그 동산도 빛이었다.

모진 세월이었다.
캠퍼스에 전투경찰이 침공하였고
떠난다는 인사도 없이 우린 흩어졌다.
양산 오봉산 기슭
겨울바람은
늑대의 울음소리마냥
감옥을 핥았다.

시인이 시를 쓸 수 없는 세월이었다.
가장 정직한 시 쓰기가 절필이었다.
그 시절의 아픔을 누가 알겠는가?
그 모진 세월을
우리는 각자의 처소에서 통과하고 있었다.
석이 그대는 바다에서
굴(oyster)을 파며 살았고
나는 망원동 지하방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 방에서
굴(cave)을 파며 살았다.

그대와 나 사이엔
아끼는 벗이 있었다.
누구라도 살면서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을
벗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땅별 어디에선가 쉬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 언젠가 벗 회찬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올 날이 있으리라.

지금은 삶의 가장자리에
황혼이 찾아들고 있는 시점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인민을 위해 봉사하며 삶을 마감할 것이다.
석이 그대는 못 다 읊은
삶의 노래를 불러 달라.

2021년 11월 18일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벗 황광우 드림.

[황광우 작가, 인문연구원 동고송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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