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벗어난 역사적 위업 이뤘다" 중국 공산당의 영구집권 논리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 11.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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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7회>

<티베트 자치구의 빈곤층의 모습/ https://www.tibetanreview.net/china-targets-tibet-in-2020-poverty-elimination-goal/ >

“중국공산당 100년의 최대 업적, 탈빈 전투에서 승리”

탈빈공견(脫貧攻堅)!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견고한 적의 진지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2012년 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시진핑 정부는 소강(小康, 샤오캉) 사회의 실현을 위한 “빈곤과의 전쟁”을 최우선의 정책 과제로 내걸어 왔다. 급기야 시진핑 정부는 2021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탈빈공견”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이래 전국적으로 832개 빈곤 현(縣)이 모두 오명을 벗었다. 12만 8천개 빈곤 촌(村)이 전부 가난의 딱지를 뗐다. 1억 명에 달하는 빈곤 인구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는 유엔이 설정한 2030년 목표치를 10년이나 앞당겨 실현하고, 절대빈곤의 문제를 해결한 역사적 위업이다. 우리는 빈곤층을 줄여가는 인류의 역사에서 기적을 창조했다.”

2021년 11월 11일 발표된 중공중앙 19기 6차 전체회의의 “중국공산당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 및 역사경험에 관한 결의”에 담겨 있는 문단이다. 시진핑 정부가 지난 10년의 통치를 통해 중국공산당 “첫 번째 100년”의 목표인 “소강 사회” 실현을 급기야 달성했다는 중공중앙의 자체 평가다. 이 결의문에 따르면, 시진핑 정부의 이 “위대한” 성취는 “당 중앙의 집중적이고 통일된 영도력” 아래 전국의 모든 인민이 “중국몽”의 실현을 위해 다 함께 분투해 온 결과이다.

중국공산당 “첫 번째 100년”의 역사는 산간벽지 소비에트의 게릴라 전투에서 시작했다. 28년 만에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중국공산당은 조속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과도한 집산화의 폐해와 문화혁명의 광기로 곤경에 처했지만, 1978년 개혁개방 이래 연평균 거의 10%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급기야 세계 제2위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큰 나라로 탈바꿈했다.

<쓰촨성 빈민 가정의 저녁식사, 2016년/  Photo: Imaginechina>

그 “첫 번째 100년” 최후 10년의 과제는 이름하여 “탈빈공견의 전투”였다. 시진핑 정부 10년 동안 전국에 산재해 있던 가난한 인민을 극빈의 늪에서 건져냈다. “소강 사회”의 실현이라는 중국공산당 100년의 위대한 업적이란 결국 “탈빈,” 곧 “빈곤 탈출”의 내러티브에 지나지 않는다.

“탈빈”의 내러티브 밑바닥에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논리가 깔려 있다. 중공중앙은 “당의 영도력은 전면적, 체계적, 총체적이며,” “당은 개인주의, 분산주의, 자유주의, 본위주의(本位主義, 분파주의), 호인주의(好人主義, 적당주의) 등”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방지하고 반대할 것”을 천명한다. 나아가 중공중앙은 인민 개개인의 정신적 대오각성까지 요구하고 있다. 가령 중공중앙의 2021년 “결의”에는 아래와 같은 문단도 포함돼 있다.

“마르크스주의 신앙(信仰), 공산주의의 원대한 이상,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공동 이상은 중국공산당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 영혼이다. 이상과 신념은 중국공산당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칼슘이다. 중국공산당 사람들이 이상과 신념이 없다면, 정신적 칼슘 부족으로 연골증을 일으켜서 반드시 정치적 변질, 경제적 탐욕, 도덕적 타락, 생활상의 부패를 초래한다.”

개발독재의 시대를 경험했던 한국인들에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등의 노랫말처럼 귀에 익은 이야기다. 빈곤 탈출의 범국민적 염원을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단기간 내에 실현한다는 전형적인 개발독재의 발상이다. 그 시절 한국인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자주독립, 인류공영, 창조의 힘, 개척 정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을 우리의 삶의 길”이라 배우며 자랐다.

한국의 경우 경제성장은 정치적 민주화로 직결됐다. 20-30년에 걸친 고도의 경제성장은 두터운 중산층을 낳았고, 중산층은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독재를 종식했다. 사회과학자들은 흔히 한국 모델을 일반화하여 “경제성장이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테제를 주장하지만, 과연 한국형 민주화 모델이 중국에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국가 성립 초기부터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중국은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다. 과연 앞으로 중국은 어떤 길을 갈까?

<40년간 7억 명의 “탈빈”! 소강 사회 앞으로!/ 중국 인터넷>

“중국공산당 두 번째 100년, 사회주의 강국의 전면 건설”

2017년 10월 24일 제1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반포된 “중국공산당 장정”을 보면, 중국공산당 “두 번째 100년”의 목표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적 건설”이라 명시되어 있다. 중공중앙의 공식입장에 따르면, 이미 “소강 사회”에 진입했으므로 중국은 2022년부터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 노선 역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벗어나지 않는다.

“전국 각족(各族) 인민을 영도하고 단결시켜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여 ‘4항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개혁개방, 자력갱생, 간고(艱苦, 힘들고 어려운) 창업 (정신)을 견지하여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적이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여기서 4항 기본원칙이란 1) 사회주의 노선, 2) 무산계급독재, 3)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4항을 이르는데, 1979년 개혁개방을 막 개시한 덩샤오핑이 당시 거세게 일어났던 정치 자유화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고심 끝에 밝힌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논리였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덩샤오핑의 논리는 지금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지탱하는 이념적 기반이다.

“중국공산당 장정”에 명기된 중국공산당의 궁극적 목적은 공산주의의 실현이다. 그 꿈은 아득히 먼 미래에나 실현될 수 있는 원대하고 고원한 유토피아의 이상이다. 그 유토피아에 다가가기 위해선 일당독재가 필요하다는 전형적인 “유토피아적 전체주의(utopian totalitarianism)”의 레토릭이다. 공산주의라는 먼 미래의 비전을 담보로 오늘날 인민의 자유를 차압할 수 있기에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상”이 인민의 “정치 영혼”이라 선전하고 있다.

<2021년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식/ (Ng Han Guan/AP)>

시진핑 정부 들어 사상, 이념 교육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중공중앙 선전부와 중국 교육부는 2016년 이래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산둥대학, 우한대학 등등 전국의 주요 대학마다 “전국 중점 마르크스주의 학원”을 새롭게 건립해 가고 있다. 2020년 9월 중국 교육부는 2020년 가을 학기부터 37개 전국 중점 마르크스주의 학원에 “시진핑 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 개론” 수업을 전면적으로 개설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개발독재의 경제성장이 정치자유화로 직결됐던 한국의 경험과는 정반대로 중국의 경제성장은 사회주의 이념교육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한국과는 달리 2020년대 중국에서 소위 “민주화” 세력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처럼 고립된 소수의 반체제인사들이 산발적인 항의를 이어가는 듯하다.

과연 앞으로 100년 중국의 인민은 계속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중국식 개발독재의 논리가 형성되던 197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중국 내 자유민주파의 물줄기도 흘러...일당 독재 세력에 도전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7년에 걸친 마오쩌둥의 강력한 통치는 두 가지 큰 문제를 남겨 놓았다. 중국의 비판적 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표현을 빌면,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에게서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전제(專制, 독재)”를 동시에 물려받았다. 빈곤 탈출의 경제 개혁과 전제 극복의 정치 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를 두고 네 개의 세력이 등장해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첫째, 마오 사후 곧바로 최고 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1976년 10월 6일 “사인방 분쇄(粉碎)” 작전을 직접 이끈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은 “양개범시(兩個凡是, 두 개의 모든 것)”를 외쳤다. “마오가 말한 행한 모든 것, 마오가 말한 모든 것은 옳다”는 구호 아래 그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수하고 공산당 일당독재를 그대로 계승하려 했다.

둘째, 화궈펑과는 달리 1950년대부터 경제계획을 입안했던 전문 관료 천윈(陳雲, 1905-1995)은 문화혁명으로 얼룩진 “만년의 마오”에는 거리를 두고 “1950년대 마오”의 경제 계획을 계승하되 공산당의 영도력은 절대 흔들릴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천윈은 대약진과 문화혁명의 착오는 인정하지만, 문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근본 오류가 아니라 단지 운영 주체의 미숙과 정치적 광열일 뿐이라 판단 아래 이제 진정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현하자고 외쳤다.

셋째, 1962년 이미 “흑묘백묘론”을 펼쳤던 덩샤오핑은 당내의 독단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전격적인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과감한 개혁개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덩샤오핑은 당내 개혁 세력을 규합해 화궈펑을 퇴장시키고 천윈과의 대립 속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의 물꼬를 텄다.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오른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시작했지만, 그 역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이념은 묵수했다. 그의 노선은 이후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테제로 정립되었다.

이상 세 가지 노선의 차이는 중공중앙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노정되었다. 중앙 권력층의 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경제적 개혁과 정치적 자유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이른바 “자유민주파”가 등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사후에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유와 민주를 크게 부르짖을 수 없었지만, 개혁개방이 시대정신으로 부각되던 1978년부터 일군의 시민들이 정치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공민(公民) 사회의 열망은 1978-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 운동장의 길이 100미터 넘는 담장을 대자보로 가득 메운 이른바 “민주장(民主牆) 운동”으로 표출됐다.

<1978-79년 베이징 시단의 민주장 운동/ wikipedia.com>

이에 놀란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30일 앞에서 언급한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경제적 자유화는 추진하되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는 유지한다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었다.

1980년대 내내 정치적 자유화를 부르짖는 자유민주파의 요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발산되었다. 덩샤오핑의 “4항 기본원칙”은 톈안먼 광장의 시민들을 사회주의를 사보타주하는 폭도로 몰아가는 근거가 됐다. 결국 탱크 부대가 동원된 톈안먼 대학살은 자유민주파를 강압적으로 해산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두꺼운 땅 밑으로 “자유민주파”의 강물은 여전히 도도한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이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시대착오적 스탈린주의의 변종이라 비판하는 자생적 “자유민주파”의 논리정연한 주장에 차분히 귀 기울일 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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