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나라 망칠 포퓰리즘 거부, 한국민은 그리스·아르헨과 다르다

조선일보 2021. 11. 20.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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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전국민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을 철회했다. 이번 사건은 정치권 포퓰리즘 폭주에 국민들이 제동을 건 첫 사건으로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사진은 민주당 송영길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17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선대위 회의에서 발언하는 장면./연합뉴스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을 철회한 것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 후보는 야당 반대와 정부의 비협조를 이유로 댔지만, 사실은 현명한 국민의 벽에 부닥친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60%가 전 국민 지원금을 반대했다. 매표를 위해 내놓은 공약인데 선거에 도움이 안 되니 접은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포퓰리즘 덕을 톡톡히 봤다.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통해 24조원대 선심성 지역 개발 사업을 각 시도에 나눠주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약속하는 동시에 선거 이틀 전에 아동수당 1조원을 미리 뿌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투표 직전에 재난지원금 지급을 국민에게 일부러 상기시키기도 했다. 현금 살포는 선거 압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민주당은 선거용 현금 살포의 효과를 맹신하게 됐다. 이 후보와 민주당이 대선용 ‘현금 살포’ 카드를 쓰려고 ‘예산 분식’ 등 온갖 꼼수를 동원하려 했던 것도 이 맹신 때문이었다.

포퓰리즘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당과 정치인의 선거 승리와 권력 확보가 그 목적이다. 세상에 의무는 줄이고 혜택을 더 주겠다는 데 싫어할 유권자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대선에서 ‘수도권 이전’ 공약이 강력한 득표 효과를 거두면서 포퓰리즘 선거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군 복무 기간은 선거 때마다 줄어들었다. 반면 기초연금은 선거 때마다 대폭 오르고 있다. 무상급식·무상보육·아동수당, 반값 등록금 등 각종 무상 복지는 모두 선거의 산물이다. 급기야 지난 총선에선 야당마저도 ‘전 국민 1인당 50만원 지급’ 약속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정당들은 포퓰리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나라의 국민이 포퓰리즘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런 나라는 예외 없이 쇠락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매주 방송에 나와 서민 생활고를 덜어주는 온갖 복지 선물을 내놨다. 결국 나라가 망해 국민 수백만명이 해외로 탈출하고 남은 국민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지옥이 됐다. 국가 수장이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고 했던 그리스에선 선거 때마다 연금이 새로 생겨 연금공단이 150개나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증한 나랏빚을 숨기려 GDP 통계까지 조작하다 국가부도를 맞았다. 아르헨티나는 일자리 만든다고 공무원을 대폭 늘리고 연금 혜택도 마구 늘리다 20번 이상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부실 국가’로 전락했다.

반면 선진 민주주의 국민은 포퓰리즘 발호를 막는 분별력을 보여주었다. 스위스 국민은 5년 전 매달 300만원 기본소득을 공짜로 주겠다는 제안에 77%가 반대표를 던졌다. 노르웨이는 북해유전 덕에 1조달러가 넘어선 국부펀드의 인출 한도를 한 해 수익의 절반으로 묶어놨다. 원금과 기본수익은 미래 세대를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독일 사회당 정권은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개혁을 완수해 일자리 창출의 돌파구를 열었다.

민주당의 선거용 재난지원금 철회는 우리 국민도 선진국 수준의 분별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상보다 더 들어온 세금 19조원을 국가재정법이 정한 대로 나랏빚을 줄이는데 우선 쓰는 모범 선례까지 만들어졌으면 한다. 이 돈을 활용해 적자 국채 발행량을 줄이면 시장금리가 내려가 이자 부담 탓에 고통을 겪는 서민들에게 도움이 된다. 금리 급등세가 잡히면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포퓰리즘 병(病)은 재발한다. 특효약도 없다. 돈 다발을 흔드는 정치인이 등장할 때마다 유권자가 준엄한 심판을 내려 정치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방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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