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세운상가

김태훈 논설위원 2021. 11. 20.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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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총독부는 서울이 공습당했을 때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로3가~퇴계로를 남북으로 잇는 폭 50m 소개(疏開) 도로를 만들었다. 해방 후 이곳에 전쟁 이재민과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거대한 빈민촌을 이뤘다. ‘종삼’이라 부르는 사창가도 생겨났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수도 한복판이 이래선 안 된다”며 대대적 도심 정비에 나섰다.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1967년부터 5년간 세운상가~진양상가로 이어지는 주상 복합 건물 6동(棟)이 차례로 들어섰다. 세운상가의 시작이었다.

▶서울 시민 반응은 좋았다. 연이어 늘어선 콘크리트 구조물은 서울 근대화의 상징물이 됐다. 부자들은 상가 아파트에 앞다퉈 입주했고, 서민들은 그때만 해도 낯설던 엘리베이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갔다. 첫 국회의원 회관도 1968년 이곳에 입주했다. 1970~80년대엔 전자제품 상가로 번성했다. 시인 유하는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젊은 외국 여배우 사진과 도색 잡지까지 은밀히 거래되던 이곳을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 끝날 때쯤 한국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간하는 눈을 떴다고 썼다. 세운상가는 ‘번영의 상징’에서 ‘북한산~남산~한강을 잇는 서울의 녹지 축을 망친 흉물’로 전락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더 쾌적한 삶을 찾아 강남으로 떠났고, 의원회관도 이전했다. 가게들까지 용산 전자상가로 이사 가면서 공실률이 70%까지 치솟았다.

▶세운상가의 미래에 대한 오세훈·박원순 두 서울시장의 해법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오 시장은 2009년 노후한 세운상가를 철거한 뒤 공원과 어우러진 고층 빌딩가를 짓겠다고 했다. 박 시장은 반대로 갔다. 세운상가 건물을 보전하고 보행로를 만들었다.

▶오 시장이 엊그제 서울시의회에 출석해 “세운상가에 올라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며 “반드시 계획을 새로 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낡고 더럽던 동대문 일대를 외국 관광객들도 찾는 명소로 만들었다. 개발은 도시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하지만 보존의 가치도 무시할 수는 없다. 유럽 도시엔 수백 년 된 아름다운 고(古)건축물이 즐비하다. 세운상가가 유럽 건축과 같은 보존 가치를 가진 건물이냐는 것이 쟁점일 것이다. 개발이든 보존이든 쾌적하고 멋진 변모로 시민을 행복하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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