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의 토요일엔 에세이]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 리흐테르

김동조·글 쓰는 트레이더 2021. 11.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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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가 녹음한 연주로 이 곡을 처음 접했고 가장 많이 들었다. 이 연주를 듣다 보면 혁명의 의지가 용솟음친다. 백건우의 연주를 포함해 이 곡을 직접 들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머릿속에서 리흐테르의 연주가 동시에 시작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착각한다는 새끼 오리처럼 내겐 라흐마니노프가 곧 리흐테르였다.

리흐테르는 1915년에 태어나 1997년에 죽은 피아니스트다.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로 돌아가 죽었다. 하지만 그의 핏속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독일,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타타르의 피도 흘렀다. 리흐테르의 부탁으로 그의 일기와 메모를 편집한 브뤼노 몽생종의 책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 수첩’(정원)에 따르면, 리흐테르는 프랑스 피아니스트보다 라벨 연주에 뛰어났고, 독일 피아니스트보다 슈베르트 연주에 뛰어났으며, 어느 러시아 연주자보다도 프로코피예프 연주에 탁월했다. 민족성을 뛰어넘어 ‘진리’를 표현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기에 그는 루빈스타인이나 굴드의 존경을 받았다.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김동조 글 쓰는 트레이더

그가 명성을 쌓아가던 1940~1950년대 러시아는 격동의 시기였다.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 자신의 3번 교향곡을 직접 지휘했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리흐테르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치 세상이 종말을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음악이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모스크바’(리흐테르의 표현이다)에 만연했던 낭만주의의 이상을 과감하게 부수고, 20세기의 무시무시한 맥박을 통합하는 기념비적 작품들이 탄생하던 때였다. 지금 들으면 너무나 혁명적으로 들리는 그들의 음악이 당시 소련 정부 귀에 부르주아의 음악처럼 들린 것은 아이러니다. 소련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탄압하는 즈다노프 명령을 발표했다.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강한 정신의 예술가는 위대한 예술가일 가능성이 높다. 리흐테르가 그랬다. 그가 초연한 프로코피예프의 7번 소나타에 관한 글(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음악을 리히테르가 연주할 때 의자들이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고 주장한다)을 읽고 그 연주를 찾아서 듣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이 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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