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 산티아고, 탈린.. 극한 경제에서 미래를 배우다

양지호 기자 2021. 11.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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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誌 출신 英 경제학자
주민 평균 연령 53세 일본 아키타현
배달 로봇 활보하는 에스토니아 등
16만km 돌며 4대륙 9개 지역 탐구
"정부 善意로 출발한 정책이 실패..
시장·국가 사이에서 중도 지켜야"

2030 극한경제 시나리오

리처드 데이비스 지음|고기탁 옮김|부키|560쪽|2만2000원

지난 13일 폐막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렸다. 글래스고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성공한 산업도시였다. 조선업을 위시한 제조업의 메카였고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글래스고는 급격히 ‘실패’했다. 1940년대 실업자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1983년에는 실업자 10만명 도시가 됐다. 오늘날에는 직장을 가진 성인이 한 명도 없는 가구가 전체의 4분의 1(5만9000가구)에 달한다. 경제적 붕괴와 더불어 사회문제도 극심해졌다. 글래스고 거주자는 영국 다른 지역 거주민과 비교했을 때 유독 젊은 층 사망률이 높고 건강 상태가 나쁘다. 이를 지적하는 ‘글래스고 효과’라는 말까지 나왔다. 조선업 경쟁력이 떨어질 때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정작 투자가 필요했던 조선업은 외면하면서 관료들은 공공 주택 공급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그러나 신축 고층 주상복합 건물은 저층 연립주택에 살면서 끈끈함을 자랑했던 글래스고의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는 결과만 낳았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경제는 붕괴했고, 주민들의 건강은 박살이 났다. 저자는 “이제는 도시 전체가 시대에 뒤처졌다”고 말한다.

‘2030 극한경제 시나리오’라는 한국어 제목은 다소 모호하지만, 원제 ‘극한 경제(Extreme Economies)’는 분명하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경제 에디터를 지냈고, 현재 런던정경대 경제학 교수인 저자는 가장 극단적인 경제 시스템을 찾아서 4대륙 16만㎞를 여행하며 9개 지역을 찾아갔다. 그중에는 글래스고처럼 실패한 도시도 있었고, 앞으로 우리 미래에 참고가 될 최전선에서 변화를 겪고 있는 도시도 있다. 극단적인 사례를 연구해 해법을 찾는 의학의 ‘극한 원리’를 경제학에 적용한 것이다.

왜 도시냐고. 미래는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30년까지 도시 인구는 8억명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미국 전체 인구의 2배가 넘는 수치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메가시티는 43개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전망하는 2030년 모습은 세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평균 연령이 53세에 달하는 일본 아키타, 디지털 혁명을 이룬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경제적 불평등이 극에 달한 칠레 수도 산티아고다. 그는 “지구 상 대다수 사람에게 2030년은 세 도시 특징의 종합 세트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 우리 얘기가 된 저출생과 고령화는 언급할 것도 없다. 탈린은 앞으로 등장할 초디지털 국가의 예고편이다. 택배 배달 로봇이 거리를 활보하고, 60달러(약 6만6000원)짜리 ‘스마트팜’ 기기를 구매하면 창가에서 18종의 식물을 재배할 수 있다. 칠레 산티아고는 경제 기적과 함께 따라온 빈부 격차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칠레는 2010년 남미에선 처음으로 OECD에 가입했지만, 상위 10% 근로자의 소득 점유율이 50%를 크게 웃돈다. 학교도, 공원도 빈부에 따라 나뉜다. 피노체트의 시장경제와 아옌데의 사회주의 경제가 각각의 부작용을 낳은 결과다.

극한 경제를 돌아본 저자는 ‘중도(中道)’를 제안한다. 자유시장 경제도, 정부 개입도 극단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그는 어설픈 정부 개입을 더 우려하는 쪽에 가깝다. “내가 목격한 실패 사례 상당수는 ‘선의에 따른 정책의 결과’였다고 한다. 글래스고 조선업의 경쟁력을 갖게 하려던 계획도, 콩고가 수력발전으로 킨샤사를 산업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던 계획도, 이론적으로는 일리가 있었다. 이 모든 계획은 어떤 식으로든 시장을 길들이거나 지배하고자 한 정부의 시도와 관련이 있었고 하나같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저자가 바로 서울로 왔다면 다녀야 할 도시가 줄었을 것이고, 그만큼 탄소 배출량도 줄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속한 고령화와 빈부 격차는 이제 바로 한국의 이야기다. 저자 역시 한국의 불평등과 고령화 문제를 우려한다. “칠레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소득 불균형이 아시아·태평양 연안 22국 중 가장 나쁘고, 불평등한 교육 기회는 우려스럽다”고 한다.

제조업이 붕괴하면서 벌어진 글래스고의 실패 사례도 남 일이 아니다. 저자는 대구를 글래스고에 비교한다. 그는 “대구는 1인당 GDP 기준으로 보면 한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분류된다”며 “섬유산업이 붕괴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다. 더 극한의 길을 걸은 글래스고는 반면교사가 되어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위험한 지역을 여행할 때는 유능한 현지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발로 뛰며 500명을 인터뷰해 책을 썼다. 코로나는 어떤 경제도, 어떤 삶도 순식간에 뒤흔들릴 수 있음을 알려줬다. 위기의 시대에 믿을 수 있는 셰르파를 만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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