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외면하고 행동 않는 지성은 곧 '인간다움'을 잃은 죄인 [박상진의 우리 시대의 단테 읽기 ②]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2021. 11. 1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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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마저 비웃는 '비겁자'

[경향신문]

단테는 지옥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려 하는 최악의 죄인으로 ‘의지도 없고 실천도 없이,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을 꼽는다. 단테는 이들이 잠에 취해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존재라고 본다. 이들은 지옥의 변방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파리 떼와 벌 떼의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벌레들에게 둘러싸이는 벌을 받는다. 그림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1797~1799, 왼쪽), 귀스타브 도레의 ‘어두운 숲속의 단테’(1861).
우리 살아가는 길 중간에
나는 어느 어두운 숲 속에 서 있었네.
곧은길이 사라져 버렸기에.
......
어떻게 거기 들어섰는지 말하기 쉽지 않으나,
진정한 길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때
잠에 너무나 취해 있었다.
그러나 무서움에 내 마음이 찢겨 나간
저 골짜기가 끝나는 그곳에,
어느 언덕 기슭에 이르고 나서야
위를 바라보았고, 그 등성이가 보였는데,
다른 자들을 각자의 길로 올바로 이끄는
행성의 빛줄기에 벌써 휘감겨 있었다.
([지옥] 1곡 1~18행)

■잠든 지성은 괴물을 낳는다

곧고 올바른 길 강조한 단테에게
구원이란 섭리의 일방 작용이 아닌
인간의 지성이 스스로 만드는 것

살다보면 곧은길에서 벗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누구나 그렇듯, 단테도 그랬다. 늦은 나이에 정치에 뛰어든 지 불과 5년 만에 피렌체를 대표하는 6인의 최고위원에 선출되면서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 당시 극도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던 정쟁의 기본 구도는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었다. 다른 도시들처럼 피렌체도 황제와 교황을 옹호하는 두 파벌을 중심으로 시민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단테는 파벌의 대립을 소멸시키고 적법한 권력을 세울 때 비로소 피렌체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속 권력을 탐하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피렌체가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한다. 그런데 마침 그가 피렌체를 떠나 있는 동안 교황과 결탁한 파벌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난다. 무력으로 집권한 새로운 정부는 단테를 배임 및 뇌물수수로 기소하고, 궐석재판을 열어 추방을 선고한다. 피렌체에 복귀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조항도 곧 추가되었다.

<신곡>을 시작하는 위의 인용문에서 “어두운 숲”은 당시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여 생겨난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를 가리킨다. 단테는 “진정한 길”을 잃어버려 “어두운 숲”에 들어선 이유를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지금 잠에서 깨어 숲을 두리번거리며 헤매고 있다. 잠들었던 지성이 깨어나 행동을 시작하는 상태다. 지성은 그를 숲이 끝나는 지점까지 인도하며, 그곳에서 비로소 위를 바라보자 언덕 등성이를 휘감은 별빛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별빛이 모든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그 별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주어져 있다. 단테는 곧고 올바른 길을 거듭 강조한다. 앞으로 그는 길을 잃어버린 이유와 경위를 밝히고 길을 회복하는 과정을 들려줄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잠에서 벗어나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그가 추구했던 구원의 길이다. 단테에게 구원이란 섭리의 일방적 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지성을 발휘하여 스스로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필요한 것은 용기다

결국 단테는 존경하던 작가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으로 황혼녘의 거칠고 쓸쓸한 길로 나선다. 그러나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으로 내려가는 그 힘든 여행을 감당할 힘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의심한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의심 뒤에 도사린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비겁하다 일깨워준다.

왜, 왜 주저하는가,
왜 마음속에 그리도 겁을 품는가,
왜 용기와 솔직함이 없는가?
([지옥] 2곡 121~123행)

베르길리우스는 ‘왜’라는 의문사를 세 행에서 무려 네 번이나 거듭하며 단테를 다그친다. 주저하고 겁을 내는 이유를 묻고 판단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저”와 “겁”을 버리고 “용기”와 “솔직함”을 찾으라는 명령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베르길리우스는 주저와 겁을 버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스스로에게 자존감과 내적 확신(이들이 “솔직함”의 숨은 뜻이다)을 불어넣어준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용기는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휘둘리지 않으며 과감하게 소신을 펼쳐나가는 기반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촉구와 격려 덕분에 단테는 마침내 지옥으로 가는 발길을 떼어놓는다.

■치욕도 찬사도 없이 살았던 슬픈 영혼들

막중한 임무 회피한 당대 교황처럼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는 사람들
비겁하고 무책임한 죄인으로 간주

단테가 지옥에 들어서자마자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허공에서 불어닥치는 회오리바람에 모래알처럼 휩쓸리는 망령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지옥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지옥의 변방, 즉 아케론 강을 건너기 이전의 구역에 머물고 있다. 천국에 오르지도, 지옥에 떨어지지도 못하는 이들은 천국과 지옥이 모두 거부하는 최악의 죄인들이다.

치욕도 찬사도 없이 살았던
자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지옥] 3곡 34~36행)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고 안락하게 사는 사람은 비난도 찬사도 받지 않는다. 단테는 이들이 의지도 없고 실천도 없이,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사는 죄를 저질렀다고 간주한다. 단테는 지옥이 벌하는 수많은 죄의 기본 유형을 부절제, 폭력, 사기로 분류하는데, 이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마땅히 죄를 저질렀다 할 수도 없건만, 단테는 지옥마저 이들을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단테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막중한 책임을 회피한 비겁한 영혼이라 부른다([지옥] 3곡 59~60행). 그 영혼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신곡>을 읽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수많은 후보자가 거명되었는데,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당시 교황이었던 켈레스티누스 5세다.

80대의 고령 은둔 수사로 명성이 높았던 피에트로 델 모로네는 1294년 4월4일 소집된 콘클라베(Conclave·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 추천되어 켈레스티누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올랐다. 그러나 공직을 수행하려는 열의가 부족하여 불과 5개월 만에 사임한다. 교황은 종신직이지만, 죽기 전에 교황직에서 물러난 사례가 있다는, 당시 교회법 전문가였던 추기경 카에타니의 거짓 조언의 힘이 컸다(나중에 단테는 지옥 밑바닥에서 사기범들 속에 섞여 있는 카에타니를 발견한다).

교황을 들쑤셔서 자리를 넘겨받은 추기경 카에타니는 보니파키우스 8세가 되었다. 물러난 교황은 다시 은둔 수사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후임자에 의해 2년 남짓 감금된 끝에 사망한다. 1988년 그의 두개골을 엑스(X)레이로 촬영한 결과 5㎝ 크기의 구멍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의 사망에 어떤 음모가 개입했다는 심증이 짙다.

황제와 다투면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회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권력욕은 사실상 그가 끌어내린 전임 교황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되었다. 그저 안온하게 숨어서 고행하는 은둔 수사의 삶은 사회의 엄중한 요청을 외면하는 죄였다. 그 비겁한 영혼은 사회의 혼란을 야기했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의 변방에 떨어져 지옥이 비웃는 신세가 되어 있다.

구더기에 시달리는 비겁한 영혼들
정녕 살아있지도 않았던 이 비열한 자들은
벌거벗은 채, 거기 있는 거대한 파리와
벌 떼에게 무참히도 찔리고 있었다.
찔린 얼굴에서 피가 눈물과 뒤섞여
흘러내렸고, 지긋지긋한 벌레들이
다리에서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지옥] 3곡 64~69행)

지옥의 영혼들은 모두 벌거벗고 있지만, 특히 이곳 지옥 변방에 머무는 비겁한 영혼들의 벌거벗은 몸은 설상가상으로 파리 떼와 벌 떼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상황이니, 이를 보고 단테가 얼마나 경멸스러운 시선을 던졌는지 알 수 있다. 이 하찮은 미물들이 만든 상처에서 솟아난 피가 다리까지 흘러내리고, 그 피를 벌레들이 빨아먹는다. 여기서 벌레는 남의 살을 먹고 자라나는 구더기로 짐작된다. 비겁한 영혼들은 제 몸뚱이 하나 어쩌지도 못해서 구더기를 떼어내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옥 변방의 비겁한 영혼들은 구더기들조차 무시하고 비웃는, ‘인간’으로서 가장 경멸적인 존재들이다.

비겁한 영혼들이 구더기에게 생살을 파먹히는 이유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테가 말하는 비겁은 용기와 행동의 결여라는 점에서 부동과 침묵의 반지성주의에 직결된다. 직면해야 할 것을 회피하고, 귀 기울여야 할 때 안 들리는 척하고, 몸을 움직여야 할 때 도사리는 태도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인간답지 않은 모습이다. 천국의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옥의 어둠을 직면하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사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겁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善)의 대척점에 서 있다.

■지성은 행동이다

자성 능력 잃은 집권 진보세력도
둥지 속에서 나와 비판 인정하며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응답해야

선은 인간다움에서 나오고 악은 인간다움을 잃으면서 생장한다. 단테는 인간다움의 첫째 조건은 지성이며, 지성은 용기와 행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으로도 지성을 잃고 악으로 기울어지며 인간다움을 잃는다는 말이다. 잠에서 깨어 지옥을 직시하고 용기를 내어 행동하는 단테의 모습. 이것이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행동이 없으면 행동의 목표도 흔들린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 세력은 집권하기 시작한 이래 찬사만 있고 치욕은 없었다. 치욕은 상대에게만 해당된다는 생각, 자신은 늘 옳다는 확신과 자부심만이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 지성은 퇴화하여 스스로를 돌아보는 능력을 상실했고, 일찍이 저항했던 배타적인 기득권 지배 권력이 되었다. 비겁하게 둥지 속에 도사리지 말고, 이런 비판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거듭날 수 있고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응답할 수 있다. 그 거듭나는 응답이 곧 행동이고 진보다. 진보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필요하고, 수많은 미완의 개혁 과제들이 아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박상진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이탈리아 문학 및 비교문학 전공.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 방문교수를 지냈고, 현재 부산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곡> <데카메론> 등의 역서와 <단테 ‘신곡’ 연구> <사랑의 지성: 단테의 세계, 언어, 얼굴> <단테>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A Comparative Study of Korean Literature: Literary Migration> 등의 저서가 있다.

박상진 부산외대 이탈리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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